"하윤 씨."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태산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의 눈빛이 처음으로 공격적인 게 아니라, 정확했다.
“당신이 말하지 않아도,
이제는 알 것 같아요.”
하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여유도, 핑계도 없었다.
“내 기억에서,
당신이 없다는 게 더 이상 말이 안 돼요.”
그는 숨을 내쉬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내가 뭘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어요.
근데 당신은…
전부를 알고 있잖아요.
내가 웃던 날도,
힘들어하던 날도."
"태산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하윤은 그제서야 고개를 떨궜다.
테이블 아래 손이 파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
"너 다쳤었어."
조용한 말이었다.
뭔가를 터뜨릴까 봐 말 끝이 자꾸 줄어들었다.
"나 때문에.
그 일로… 네가 다치고,
난…
그게 무서웠어."
태산은 그 말을 가만히 들었다.
눈을 감았다가 떴다.
무언가 말할 듯 말 듯, 입술을 다물었다.
“그래서… 그래서 날 잊게 만든 거예요?”
"응."
“그게 답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때는 그게… 너를 지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어."
그는 잠시 웃었다.
웃긴 건지, 허탈한 건지 모를 그런 웃음이었다.
“지우는 게 지키는 거라고요?”
“넌 행복해 보였잖아.”
“적어도, 더는 다치지 않았고…
내가 없는 게 오히려 나았던 것처럼 보여서.”
“행복했는지 아닌지는 나한테 물어봤어야죠.”
태산의 말이, 작지만 분명했다.
“왜 혼자 다 정하고, 혼자 떠났어요?”
하윤은 아무 말도 못 했다.
그 말이 맞았기 때문에.
"나는 그냥…"
목소리가 떨렸다.
"…내가 너한테 없어도 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럼… 네가 더 편하지 않을까 해서."
“내가 편해지기 위해서 당신을 잃어야 했다면,
그건 편한 게 아니에요.”
태산이 고개를 돌렸다.
“그건 그냥, 공허해지는 거예요.”
둘 사이에 말이 멈췄다.
조용한 카페에서
잔소리 같은 배경음악만 흐르고 있었다.
“당신은 내가 당신을 다시 사랑하게 될 거라고 믿었어요?”
그가 물었다.
하윤은 고개를 들었다.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응.”
"그게—
그 말이 너무 나빠요."
태산은 웃지도 않았다.
"기억도 없이,
이름도 모르고,
근데 마음만 남은 상태로
다시 사랑하게 되면…
그게 나인지, 아니면 당신이 남긴 감정의 잔상인지
어떻게 알아요?"
그 말에
하윤은 눈을 감았다.
“그래도 그게 사랑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태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말했다.
“지금 나는 당신이 너무 익숙해요.
근데 그 익숙함이
좋아서 더 싫어요.”
“왜?”
“익숙하다는 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감정들이
계속 올라온다는 뜻이니까요.
근데… 난 그 이유를 몰라요.”
하윤은 조용히 말했다.
"알게 될 거야.
조만간."
“그때도 지금처럼 말해줄 거예요?”
“무슨 말?”
“나를 사랑했다고.
지금도 그렇다고.”
그 질문은 잔인했다.
하지만 하윤은 대답했다.
“응.
그건 계속 말할 수 있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