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기억해, 너만 빼고

기억장애 / 감정은 남고 기억은 없다

그날, 태산은 거울을 오래 들여다봤다.

 

눈 밑은 약간 푸르고,

입술은 평소보다 더 말라 있었다.

 

그는 손끝으로 자신의 눈가를 따라 그렸다.

꿈에서 봤던 장면이

자꾸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누군가가 그를 안아주는 장면.

이마에 입 맞추던 순간.

그리고—

 

"다음 생에 우리가 다시 만나면… 그땐 잊지 마."

 

말도 안 되는 대사.

근데 진짜 같았다.

 

그는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길게 울렸다.

 

그리고 연결된 순간,

목소리가 들렸다.

 

“…하윤 씨. 오늘, 시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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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두 사람은 앉아 있었고,

말이 없었다.

 

태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자꾸 꿈을 꿔요.

근데 그게… 진짜처럼 느껴져요.

단순한 상상 같지가 않아요.”

 

하윤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번엔 어떤 꿈이었어요?”

 

그는 숨을 들이켰다.

천천히, 말하면서도 정리하는 사람처럼.

 

“누가 나한테…

‘괜찮아, 기억 안 나도 돼.’

그렇게 말했어요.

그리고… 날 안아줬어요..”

 

하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이상하죠.

그 꿈에서 너무… 편안했어요.

안심이 됐어요.

그 사람이 누군진 모르겠는데…

그 사람을 믿고 있었어요.”

 

하윤은 고개를 떨구었다.

 

이쯤 되면,

말해야 하지 않을까.

이쯤이면,

더 숨기는 게 오히려 잔인한 거 아닐까.

 

"…그 사람이

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본 적 있어요?"

 

그 질문.

생각보다 조용히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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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은 멈췄다.

 

그리고 아주 오래,

침묵이 흘렀다.

 

“…있어요.”

 

"처음엔 그냥 익숙하다는 생각이었는데,

요즘은…

꿈에서 깰 때마다 당신 얼굴이 먼저 떠올라요.

그게…

진짜 같아서 무서울 때도 있어요."

 

그날 저녁,

태산은 연습실에 들렀다가

낡은 노트 하나를 발견했다.

 

이전 연습생들이 남긴 물건들이라 치우려다가,

펼쳤다.

 

첫 페이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그 뒤,

한 페이지에 적힌 문장이 그를 멈추게 했다.

 

“기억을 잃어도 괜찮아.

감정은 남을 거니까.

너는 언젠가 나를 다시 사랑하게 될 거야.”

 

그의 손이 떨렸다.

 

그 문장이,

방금 하윤이 했던 말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그는 가슴이 막혀오는 걸 느꼈다.

 

다음 날.

하윤은 태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다가와, 앉았다.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노트에서 글귀 하나 봤어요.”

“그게, 당신이 쓴 거 맞죠?”

 

하윤은 웃지 않았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말했다.

“그 문장을,

당신이 어제 말했어요.”

 

침묵.

긴, 침묵.

 

"…왜요?"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왜 나한텐 아무 말 안 해요?

내가 그 기억을 잃은 게,

그게… 당신 때문이에요?”

심장에 칼을 꽂는 듯한 질문.

 

하윤은 숨을 멈췄다.

“…응.”

작은, 너무도 작은 대답.

 

"그럼 왜 돌아온 거예요?

왜 나한테 다시 왔어요?"

 

하윤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보고 싶어서 돌아왔어.

근데 너는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게 너무 잔인하더라."

 

태산은 고개를 떨궜다.

“내가…

당신을 사랑했었나요?”

 

하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을 뻗어, 그의 손을 가만히 덮었다.

 

“응.

너무,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