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기억해, 너만 빼고

돌아온 시간 / 태산은 나를 모른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낯설지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이상한 건, 내가 지금 이 방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익숙한 책상, 침대, 벽에 붙은 오래된 포스터.

잊고 있던 자취방의 가구들.

내가 분명히 떠난 지 오래된 공간인데도, 그대로였다.

 

휴대폰을 켰다.

잠금화면에 떠 있는 날짜.

 

'2024년 6월 21일'

 

숨이 걸렸다.

이건 장난이다. 뭔가 시스템 오류.

일어나자마자 술이 덜 깼나? 어제?

어제가 있었나?

 

뉴스 앱을 켰다.

그 시점의 기사들이 그대로 떠 있었다.

세상은 아직 그때를 살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러자, 머릿속에 파도처럼 밀려오는 기억 하나.

 

태산.

마지막 날.

울고 있던 얼굴.

그가 했던 말.

 

"이제 그만하자. 더는 네가 나 때문에 울게 만들고 싶지 않아."

"네가 날 잊어줬으면 좋겠어. 그래야 내가 편해질 수 있을 것 같아."

 

그는 그렇게 말하고, 나를 떠났다.

그리고 그 이틀 뒤, 사고가 났다.

돌이킬 수 없게, 되돌릴 수 없게.

 

하지만 지금 나는 여기 있다.

그 날들보다도 이전의 시간 속에.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그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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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후.

나는 그를 다시 보았다.

 

예정되어 있던 스케줄을 기억하고 찾아간 건 아니었다.

아니, 맞다.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날 모른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걸 확인하는 순간이 오면 무너질 걸 알았으니까.

 

하지만 마주친 순간, 모든 계획은 무너졌다.

나는 도망치지 못했다.

강남의 연습실 복도에서,

그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내 앞을 지나쳤다.

 

모자를 푹 눌러쓴 채,

크지 않은 백팩을 들고,

귓가엔 이어폰.

음악이 새어나왔지만, 무슨 노래인지 알 수는 없었다.

 

나는 그대로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듯, 숨소리마저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그가 멈췄다.

잠깐. 정말, 아주 짧게.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심장이 떨렸다.

 

그 눈빛.

익숙하면서 낯선,

마치 어디선가 본 듯한 사람을 보는 눈.

 

하지만 그는 몰랐다.

정말, 나를 몰랐다.

 

“죄송한데… 누구세요?”

 

그 말이 나왔을 때,

나는 그제야 숨을 삼켰다.

 

“아… 아니에요.”

목소리가 생각보다 떨리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나는 애써 웃었다.

“닮아서요. 아는 사람이랑.”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전부였다.

 

그의 반응은 담담했고,

나는 그 안에서 나를 찾을 수 없었다.

 

태산은 나를 모른다.

모른 척 하는 게 아니라, 진짜 모른다.

눈빛에도, 말투에도, 나를 안다는 기색은 없었다.

 

그날 밤,

나는 오래된 일기장을 꺼냈다.

시간이 되돌아오기 전에 썼던 메모.

‘혹시, 내가 기억을 지운 거라면—’

 

문장이 끊겨 있었다.

그 아래엔 낙서처럼 쓰인 단어 하나.

 

“선택”

 

나는 무언가를 선택했었다.

태산을 지키기 위해, 나를 잊히게 하는 선택을.

 

"그래서… 이렇게 된 거야?"

 

눈물이 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아무 감정도 없었다.

 

아니, 감정은 있었는데 너무 커서 무감해진 느낌이었다.

이런 걸, 무력감이라고 하나.

 

하지만 나는 알았다.

이번엔 똑같이 흘러가지 않게 하겠다고.

이번엔 그를 다시 사랑하게 만들 거라고.

 

기억이 없더라도,

감정은 남아 있을 거라고.

그걸 믿는 수밖에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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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음 날.

나는 연습실 근처에서 그를 다시 마주쳤다.

 

그는 여전히 낯설었고,

나는 여전히 그를 알고 있었다.

 

그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어제 봤던 분이죠? 닮은 사람이라던…"

 

나는 웃었다.

이번엔, 조금 덜 아팠다.

 

"그쪽 이름이… 뭐라고요?"

나는 대답 대신, 그의 이름을 속으로 불렀다.

 

태산.

기억하지 못해도 좋아.

내가 그 기억을 다시 만들어 줄게.

처음부터, 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