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페인트가 여러 번 덧칠되어있는 벙커에 이미 죽은 자들의 검붉은 혈이 다시 덧칠 되어있었다.
소현은 기분 나쁜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벙커의 벽을 긁었다.
온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에 큰 소리가 작은 벙커를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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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커의 벽을 긁자 붉은 혈로 쓰여있는 글씨가 보였다.
‘지금 이걸 본 자는 똑똑히 명심하라. 이 지옥은 오로지 한 명 만이 나갈 수 있다.’
아마도 죽기 전 마지막으로 쓴 글 같았다.
상상 속 가장 이상적이었던 세계 ‘유토피아’가 결국은 지옥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미련한 희망 또한 허무하게 흘러갔다.
이 8명이 다 살 수는 없다는 것이 이로써 소현의 머릿속엔 똑똑히 새겨졌다.
정말 허무하게도 이 3라운드는 여덟 명 만이 살아있었다.
그 말은 즉슨, 서로가 서로를 죽여야만 할 때가 왔다는 것이다.
“… 이러니까 내가 정 안 준다고 했던 거잖아.”
나즈막히 입 밖으로 꺼낸 말은 비극이 따로 없었다.
다행히 아무도 못 들은 것 같았다.

“… 고마웠어, 정소현.”
소현의 곁으로 와 앉아 거친 숨을 내쉬며 허탈한 웃음을 짓는 석진이다.
“우리 모두 나갈 수 있을 거야.”
거짓말, 또 거짓말이었다.
항상 석진은 소현에게 거짓말을 한다.
“허튼 희망 품지 마.”
어차피 우리 중 하나만 살아.
소현은 뒷말을 그대로 허공속에 삼킨 채로 로봇처럼 서있는 A를 바라봤다.
- 3라운드를 시작하기 전, 공지하겠습니다.
올 것이 왔구나.
- 이 3라운드에서, 오로지 단 한 명만이 유토피아를 나갈 수 있습니다.
아아, 오지 않길 바랐는데.
- 그럼, 3라운드 시작.
A는 그대로 뒤로 돌아갔고, 소현과 석진을 제외한 모두는 당황한 듯 동그래진 눈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이게 무슨 말이야. 단 한 명이라니.”
“놀랄 거 없어. 어차치 한 명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잖아.”
이번엔 소현이 거짓말을 했다.
크게 놀란 정국의 질문에 소현은 괜스레 더 차갑게 답했다.
곧 이어 누군가 칼에 찔리는 소리가 들렸다.

“야, 민윤기!”
윤기는 그들의 대화를 유심히 듣는 건지, 딴 생각을 하는 건지 아무 말이 없다가 방심한 틈을 타 자신의 명치에 칼을 꽂았다.
“야, 정신 차려. 민윤기! 야!”
이미 숨을 거둔 듯 한 윤기의 표정은 그 무엇보다 편안해 보였다.
소현은 마치 정신이 나간 사람 처럼 윤기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정소현. 그만 해.”
소현의 손을 붙잡은 건 석진이었다.
“이러면 뭐가 달라져. 어차피 민윤기는 죽었어.”
충격적이었다.
아니, 어쩌면 석진이 가장 충격적이었을련지 모른다.
눈빛에는 투명하게도 아무 것도 비춰지지 않았다.
그렇게 적막만이 흐르던 순간, 호석은 급하게 일어나 A가 나간 문을 세게 두드렸다.
“이봐, 문 열어. 많은 건 안 바랄게. 제발 내보내줘. 나가서 윤기형 치료도 받고, 우리 잘 살게 해줘. 제발.”
대답 따윈 바라지도 않았지만 없었다.
호석은 들고 있는 쇠막대로 여러번 문을 쳤지만 부숴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 민윤기는 이미 죽었어.”
그 말을 한 건 소현이었다.
“여기 들어온 게 잘 한 걸까.”
“… 우리끼리 싸우면 안되는 거잖아.”
정국이 물음표 없는 질문에 답했다.
어쩌면 소현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있잖아, 정소현.”
“…”
“내가 많이 고마웠던 거 알지?”
“… 야 전정국.”
“나는 25살이야.”
“정신 차려. 같잖은 생각 하지 말라고.”
“아마도 누나겠지? 석진형이랑 동갑이니까.”
“야.”
“소현누나, 고마웠어.”
“미쳤어, 너?”

“사실 이 짧은 시간동안 웃기게도 누나가 그리 좋았다? 더 정 주고 싶었기도 했었고. 꼭 살아 나가.”
그 말을 끝으로 작게 인사를 읊은 정국은 자신의 머리를 망치로 세게 쳤다.
이 유토피아에서 나가는 방법은 죽음이 다였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