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떠날 거면 날 사랑하지나 말지_
" 어? 태현,!.... "
네가 웃고 있었다 다른 여동기와 서로 마주 보며 환하게. 그 순간 나는 불청객이 되어버린 것 같은 창피함에 네가 날 알아보기 전에 강의실 앞 기둥 뒤로 몸을 숨겨버렸다 이제는 더 이상 널 웃게 할 수도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내가 얼마나 비참한지 너는 아무것도 모를테였다 네가 여동기와 팔짱을 끼고 저 멀리 사라지는 것을 보고나서야 기둥 뒤에서 천천히 빠져나왔다 너에게 난 대체 뭘까.
' 저렇게 보니까 강태현이랑 연희정이랑 잘 어울리지 않냐? '
' 에이, 강태현 여친 있잖아. '
' 야 대놓고 저러고 다니는 거 보면 모르겠냐? 쫑난 거지. '
정말 우린 대체 뭘까 태현아.
더 나올 눈물이 없어서 눈이 아팠다 단지 그것 뿐이었다 애써 들려오는 말들을 무시하며 네가 향한 곳과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함께 걷던 길을 혼자 걸었다. 혼자 버스를 타고, 혼자 도서관에 앉아 과제를 하고,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순간에 네가 있었음을 또 한번 깨달아버렸다. 버스를 타면 자리를 맡아주던 네가 있었고, 도서관에선 옆자리에 딱 붙어앉아 장난치던 네가 있었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보내기 아쉽다며 내 손을 놓지 못하던 네가 있었다. 결국 나는 집앞에서 또 남은 줄도 몰랐던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 아...아흐..흐엉...으흐... "
나는 아직도 네가 준 그 작은 순간조차 너무 소중해서 다 꺼내 보지도 못 했는데 너무 아까워서 차마 어루만지지도 못하고 아껴두고만 있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다 꺼내서 네게도 보여줄 걸 그랬어 그랬다면 네가 좀 더 날 사랑했을까 이렇게 말도 안 되게 끝이 와버리는 일은 없었을까 심장이 너무 아파서 숨이 막혀
더이상 흘릴 눈물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은 내 착각이었다는 듯 나는 너의 환영에 매달려 한참을 울었다 정말 놓아야만 하는 걸까 꼭 너를 놓아야 하는 건가 견딜 수 없는 생각들이 온 머릿속을 헤집었다 정말 단 한순간도 네가 없는 세상에 남겨질 자신이 내겐 없었다 정말, 자신이 없다.
*
*
*
2주 만이었다. 그날 이후 2주 만에 어렵게 너와 데이트 약속을 잡고 자주 다니던 카페에서 만났다. 하지만 우린 카페의 소음과는 동떨어진 사람들처럼 내내 적막했다. 휴대폰에서 단 한 번도 시선을 떼어주지 않는 너에게 서운했다. 서운하고 속이 상했다 나는 너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은데 너에겐 더이상 나와 나누고 싶은 얘기가 없는 걸까 그저 의무감으로 나를...아니 아닐거야.
" 저...태현아, "
" 다 마셨지, 약속 있어서 먼저 갈게. "
딸랑-!!
" ...응. 약속 잘 다녀와 태현아. "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네가 자리를 떠나버렸다. 내 커피는 아직 손도 대지 않았는데 아직 나는 네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는데 잘가라는 말도 못 해줬는데 뭐그 그렇게 급했을까 너는. 식어버린 머그컵을 조심히 붙잡으며 의미없이 허공에 작별 인사를 했다. 휴대폰에서 시선을 떼고 나를 바라봐 준 찰나의 얼굴이 너무 오랜만이어서 괜시리 코가 시큰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담아두는 건데.
억지로 머그잔을 다 비우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어쩌면 네가 다시 돌아올 지도 모른다는 헛된 희망을 여지껏 품은 걸지도 몰랐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어버린 건지 알 길이 없었다 내가 뭘 잘못했나 너무 애처럼 굴었나 너무 어리광을 부려서 그래서 내가 귀찮아진 걸까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채웠다가 빠져나가고 또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좀 더 너를 위해 주자고 그럼 괜찮을 거라고.
처음엔 너무 써서 잘 마시지도 못했던 술이 네 덕분에 느는 것도 순간이었다. 아무 곳이나 자리를 잡고 계속 술을 들이켰지만 들이킨 양이 무색하게 정신은 점점 더 또렷해져 갔다. 나 혼자 설레발 치고, 나 혼자 기대하고, 나 혼자 무너지는 이런 바보 같은 상황이 웃겨서 웃음이 났다.

어? 태현이?
잘못 본 거라고 생각했다 드디어 취해서 환영을 보고 있는 거라고 하지만 점점 부드럽게 미소 짓는 너의 얼굴에 그제서야 진짜 꿈에서 깨어났다. 네가 정말로 저 앞에 있다는 사실에 기대에 날뛰는 심장을 제지하며 빠른 걸음으로 너에게 다가갔다 정말, 정말 네가 돌아와 준 걸까. 스스로 만든 기쁨에 빠져 네가 우산을 쓰고있다는 것도 지금 비가 오고 있다는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네 앞에 섰을 때,
" 태현!,....아. "
" 백여주? 너 나 따라왔어? "
" 아니, 우연히 본 거야. 근처에서 밥 먹고 있었어. "
" 근데 약속이...희정이랑 잡은 약속이었어? "
" 어, 봤으면 그만 가 민폐야 이거. "
그제야 네 곁에 서 있는 연희정이 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이 다정하게 팔짱을 낀 모습은 내 남은 세상을 철저히 무너뜨렸고, 민폐라며 날 불청객으로 만든 네 말은 내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처참히 짓밟았다. 더이상 어떤 말도 목에 걸려 나오지가 않았다 더 말하면 네 입에서 이별이 나올까 봐 쉽사리 말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 좀 적당히 해, 니가 맨날 이러니까 내가 나쁜X끼 같잖아. "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내리는 비를 곧이곧대로 맞고 있는 나에게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넘긴 네가 가방에서 접는 우산을 꺼내 내 젖은 손에 거칠게 쥐어주었다. 너를 닮은 짙은 푸른색의 우산이 내손에서 처량하게 비를 맞고 있었다 너는 늘 이랬다 마음껏 미워하지도 못하게 꼭 무언가 하나를 내 손에 남겨주었다 넌 모르겠지 그 '하나' 가 내 수많은 날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아니면 이 우산 하나 붙잡고 내가 또 얼마나 아파하나 보고 싶어서 이러는 거니.
" ...미안해 태현아. 나 먼저 갈게. "
우산은 여전히 손에 쥔 채였다. 너는 여전히 비에 젖고 있는 나는 안중에도 없이 연희정이 비에 젖을까 봐 우산을 기울이고 있었다. 한때 내게 기울었던 그 우산이, 날 위해 젖던 네 어깨가 다른 사람을 향했다 남아있는 줄도 몰랐던 심장이 갈가리 찢겨 나가는 고통에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네가 준 우산은 여전히 놓지 못한 채였다 너는 왜 그렇게도 내게 잔인한 걸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