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녀와 야수
***
"아리아, 넌 왜 그렇게 제멋대로니?"
"난 아리아가 무서워."
"아리아는 좀 불편하지 않아?"
난 걔 싫어.
.
.
.
"아리아, 게으름 피우지 말고 얼른 일어나!"
이슬이 떨어지는 새벽임에도 호탕한 목소리로 소리를 치는 벤슨 부인. 그리고 그녀의 부름을 간단명료하게 무시해버리는 나, 아리아다. 나지막이 네라고 대답하긴 했으나, 거리가 상당한 탓에 분명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있다 보면 벤슨 부인이 깨우러 올 것을 알기 때문에 포근한 이불의 감촉을 느끼며 몽롱한 잠에 다시 빠져들었다. 그 후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자연스레 떠지는 눈을 비비며 상체를 일으켰다. 쥐 죽은 듯 고요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벽장 시계를 확인했다. 시침이 12시를 향해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
"벤슨 부인이 날 깨우러 안 와?"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적잖아 당황했다. 아무리 그래도 나를 버리고 가다니. 화를 참을 수 없었던 아리아는 간단하게 고양이 세수를 하고 벤슨 부인과 친구들을 찾으러 마을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런데 눈에 띄는 한 가지, 마을 주변이 온통 알록달록한 색으로 물들어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흡사 축제와 같은 분위기. 건물 사이 그늘져 어두운 골목에도 가로등 불을 켤 것인지 다 태워지고도 갈아 끼우지 않았던 양초가 새로 놓아져 있었다. 마을 일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아리아였기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길이 없었다. 마을 광장으로 나가자 보이는 벤슨 부인과 마을 주민들, 여러 명이 모여서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벤슨 부인!"
"아리아? 네가 웬일이니?"
"부인은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저는 깨우러 오지도 않고!"
"내일이 소서노 축제잖니. 그리고 내가 네 전용 시계야?"
손에 들고 있던 작은 국자로 아리아의 머리를 내려친 벤슨 부인은 새벽과 같이 큰 목소리로 호탕을 치며 요리 준비를 계속했다. 소서노 축제는 옛날부터 듣고 자랐던 축제인데, 그게 바로 내일이었나보다. 7살 때 마지막으로 본 것 같은데 이렇게 돌아오다니 반갑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재밌겠는데!"
그리고 그 시각, 작은 골목에서 작당을 꾸미고 있는 어느 패거리. 아리아는 다가올 미래도 모른 채 마냥 해맑게 좋아하고만 있었다.
***
"성배를 도둑맞았어!"
"뭐?"
"신성한 성배가 사라졌다!"
축제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의식에 필요한 성배. 마을 회관의 창고에 꼭꼭 넣어뒀는데 하필 그걸 당일에 잃어버린 것이다. 대규모 행사인 만큼 점검을 어제도 했을 텐데, 어떻게 그걸 잃어버릴 수 있는지. 주민들의 표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구겨졌다. 이윽고 나오는 성난 목소리.
"아리아! 네가 훔쳤지!"
한마디 외침에 주민들의 고개가 아리아에게 주목되었다. 한순간에 도둑으로 추앙되어 마녀사냥당하듯 질문을 받았다. 오래전에 본 것이라 기억나지도 않는 성배의 행방부터, 친한 사람 하나 없는 마을에서 누구와 함께 훔쳤는지, 훔친 의도가 무엇인지. 여론이 거세지자 팩트체크도 되지 않은 말에 비난까지 더해졌다.
"아리아, 이럴 줄 알았어. 저걸 진작에 추방해야 했다니까?"
"아무리 마을이 싫어도 그렇지, 어떻게 성배를 훔친담."
"난 항상 쟤가 꺼림직했어. 으, 더러워."
내가 아니라는 말도 여러 차례 했으나 평소 제멋대로에 자기중심적인 아리아를 싸고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나마 가까웠던 벤슨 부인마저도 눈을 스치듯 마주쳤다가 바로 시선을 옮겨버렸다. 이 마을에 아리아의 편은 없는 것이었다. 성배 도둑으로 몰린 아리아는 그대로 감옥에 처박혀 3일 동안 처분을 기다렸고, 그 끝은 추방이었다. 조사에 들어가고 하루 만에 성배가 어느 헛간에서 발견되었다지만, 그간 아리아의 악행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주민들이 추방을 원했다고 한다.
"꺼져버려."
"다신 오지 마. 얼씬도 하지 마."
"계속 그렇게 살아봐. 뼈도 못 추릴 거야."
얼마 있지도 않은 짐을 보따리에 싸서 마을 입구에 내팽개쳐진 아리아. 그녀의 뒤로는 검은 장미와 파란 장미가 어울려진 아름답고 착잡한 장미꽃밭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
이곳이 어딘지 알지도 못한 채 산속을 신발 밑창이 닳도록 계속 걸었다. 꼬박 일주일간 그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홀로서기를 한 셈이다. 그리고 맞이하게 되는 현실은 어리석고 못나던 ‘야수’와 같은 자신의 모습이었다. 이기적이고 자신밖에 모르는 성격, 이에 따라 피해를 본 주민들. 길가에 버려져 있던 저를 데리고 와 키워준 부모와 다름없는 사람들인데, 무슨 오기가 나서 그들에게 못되게 대했을까. 입이 쩍쩍 말라 수분 하나 없을 것 같은 몸에서 용케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뚝뚝 떨어졌다. 시간이 되돌아간다면 적어도 사건이 일어나기 일주일 전으로만 돌아간다면. 용서를 구할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시간을 되돌릴 방법은 없었다. 불변의 진리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다.
”아….”
덜덜 떨리는 온몸을 견디다 못해 다리에 힘이 풀려버린 아리아. 그대로 꼬꾸라진 그녀의 눈을 통해 엿볼 수 있는 메마른 생명은 참 비참했다. 아리아도 그 감각을 직감한 것인지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는 최소한의 발악조차 하지 않았다. 지금은 후회, 원망보다는 그저 사과를 전하고 싶다. 그동안 나 때문에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고만 말하고 싶다. 그 어떠한 용서도 바라지 않는다. 딱, 한 번만. 마지막으로 진심을 전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그때, 저 멀리서 들려오는 발소리와 아리아를 외치는 큰 목소리. 분명 벤슨 부인이 틀림없었다.
“아리아! 어디 있니!”
대체 왜 날 찾아 이곳까지 온 것일까. 설마 일주일 동안 내가 걸어온 거리를 똑같이 계속 걸어온 것일까? 아니면 벤슨 부인이 마을에서 쫓겨난 것이 아닐까? 당장 묻고 싶은 말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지만, 힘이 쭉 빠진 몸은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리아의 주변으로 한달음에 다가온 벤슨 부인은 쓰러진 아리아를 자신의 몸 위에 눕히며 호통을 치며 말했다.
“범인이 아니라면 아니라고 말해야 할 거 아니야.”
당사자인 나도 그 일에 대해선 억울하지만 울지 않는데 당신이 왜 나 대신 울고 있는지 모르겠다. 항상 벤슨 부인은 그런다. 왜 나 대신 화내고 웃고 우는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당신은.
“여기서 바보같이 뭐 하고 있는 거야, 아리아.”
”일어나서 뭐라고 말 좀 해봐. 말대꾸라든지, 뭐든.“
마을 주민들 모두에겐 전하지 못하더라도, 벤슨 부인 만큼은 꼭 전하고 싶다. 입을 뻐끔거리며 수분 하나 없는 상대를 움직였다. 곧이어 얕게 터져 나오는 말 한마디.
”죄송해요, 고맙고요.“
아득히 멀어져가는 정신을 붙잡을 수 없었지만, 비로소 ‘야수’ 같은 마음에서 미녀와 같은 마음씨를 흉내 낼 수 있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