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조라서 다행이야

괜히 다시 읽게 된다

그날 받아온 종이는 책상 위에 그대로였다.

버리지도 않았고, 정리하지도 않았다.

 

별 내용은 없었다.

손글씨, 한 문장.

그 사람이 발표 대본에 넣자고 건넸던 문장.

 

“생각이 많을수록, 말은 단순해지는 것 같아요.”

 

대사 하나일 뿐인데

그게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무 감정 없이 말했던 그 얼굴도.

묘하게 긴 침묵도.

이해하려고 한 건 아니었다.

 

그냥, 왜 그런 말이 그 사람 입에서 나왔을까

그 생각이 자꾸 멈춰섰다.

 

다음날 강의실에서 그를 다시 봤다.

그는 늘 그렇듯 조용했다.

교수의 말에도 별 반응 없었고,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정리하고 있었다.

 

 

 

 

 

내가 가방을 내릴 때

그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잠깐 마주쳤고,

이번엔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가볍게 인사를 받았고,

그게 전부였다.

 

말은 없었다.

그런데 어쩐지,

그 침묵이 어색하지 않게 느껴졌다.

 

점심시간이 되자

단톡방에 톡이 하나 올라왔다.

 

 

 

 

 

 

김승민:

“자료 톤은 지금처럼 유지해도 될 것 같아요.

구성만 조금 바꿔서 버전 다시 만들게요.”

 

역시나 정리된 말.

짧고, 깔끔한 문장.

내가 뭘 더 붙일 것도 없이 끝났다.

 

근데 뭔가 이상했다.

내가 아무 일도 아닌 그 문장 하나를

종이에 옮겨 적고 있었다.

 

똑같은 손글씨는 아니었다.

그냥, 베끼듯.

 

“생각이 많을수록, 말은 단순해지는 것 같아요.”

 

나는 종이를 뒤집었다.

어떤 의미도 붙이지 않으려고 했다.

내가 신경 쓰고 있다는 걸

내 글씨가 먼저 알아버린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