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나는 집에 와서도 물을 못 마셨다. 목이 텄는데 자꾸 마시려던 컵을 내려놓았다.
이상했다. 그 애가 남긴 말 때문이었다.
“내가 연기하는 건, 그냥 연습이 아니에요.”
처음 들은 말인데도 오래 전부터 들어왔던 것처럼 마음에 남았다. 짧은 문장인데, 너무 조용히 울려서.
마치 내 속을 오래 지켜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처럼.
나는 그날 울었던 걸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무대 뒤 조명 아래, 아무도 없던 자리.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주저앉았던 그 시간.
그 애는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보고 있었다.
근데 왜 아무 말도 안 했던 걸까.
왜 지금 와서 말하는 걸까.
왜 그게, 자꾸 마음에 걸리는 걸까.
-
다음날 평소보다 더 일찍 연습실에 도착했다. 문을 열었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
책상 위에도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았다.
희한하게도, 그게 조금 허전했다.
마치 누군가 먼저 켜둔 조명, 따뜻해진 히터, 정리된 대본이 이제는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던 건 아닐까.
그 애가 남기고 간 조용한 친절이, 어느새 익숙해져 버린 건 아닐까.
대본을 펴고 앉아 있는데, 한동민이 들어왔다.
평소처럼 조용히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
나는 무심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괜히 먼저 말 걸고 싶지 않아서였다.
아니, 사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그 애는 내 옆에 앉아서 대본을 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펜으로 무언가를 끄적였다. 소리도, 기척도 없는 조용한 움직임.
그 옆에 있으려니 이상하게 긴장이 되어 숨소리마저 의식됐다.
괜히 종이를 넘기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선배.”
“…응.”
“어제 말, 불편했으면 죄송해요.”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 애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펜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불편하진 않았어.”
“…진짜예요?”
“응. 그냥 좀… 생각이 많아졌을 뿐.”
말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래, 그게 맞다. 생각이 자꾸 많아졌다. 그 애와 마주치면 생각이 늘었고, 그 애가 없으면 괜히 뭔가 빠진 기분이었다.
이게 뭔데, 자꾸.
“동민아.”
처음으로, 그 애 이름을 불렀다. 입안에서 조심스럽게 꺼낸 이름 하나에 내가 먼저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그 애가 약간은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그때… 내가 울던 거, 기억에 남았어?”
“네.”
“왜?”
“…그게, 무너진 게 아니었거든요.”
“…”
“선배는… 그 순간에도 감정으로 무대에 있었어요.”
말 끝이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건, 조심과는 조금 다른 무언가였다.
확신.
동민은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그게 저한텐… 멋있었어요.”
나는 숨이 잠깐 막혔다. 어디까지가 연기고, 어디까지가 나였는지 구분도 못 하던 그 순간이, 누군가에겐 ‘멋있다’는 감정으로 남아 있었다는 게 이상했다.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네가 이 팀 온 것도, 혹시…”
“네.”
대답은 빠르고 확실했다. 그 애는 고개를 떨군 채 덧붙였다.
“그 무대가 시작이었어요. 저한텐.”
“…”
“그날 이후, 제가 하고 싶은 연기가 달라졌거든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책상 위 대본이, 갑자기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내가 그날 떨어뜨렸던 게 대사인지, 감정인지, 아니면 마음인지 모르겠는데—
그걸 주워 간 사람은,
이 작은 후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