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실 문 앞에서

04

그날 밤, 나는 집에 와서도 물을 못 마셨다. 목이 텄는데 자꾸 마시려던 컵을 내려놓았다.

이상했다. 그 애가 남긴 말 때문이었다.

 

 

“내가 연기하는 건, 그냥 연습이 아니에요.”

 

 

처음 들은 말인데도 오래 전부터 들어왔던 것처럼 마음에 남았다. 짧은 문장인데, 너무 조용히 울려서.

마치 내 속을 오래 지켜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처럼.

 

나는 그날 울었던 걸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무대 뒤 조명 아래, 아무도 없던 자리.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주저앉았던 그 시간.

 

그 애는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보고 있었다.

근데 왜 아무 말도 안 했던 걸까.

왜 지금 와서 말하는 걸까.

 

왜 그게, 자꾸 마음에 걸리는 걸까.

 

 

-

 

 

다음날 평소보다 더 일찍 연습실에 도착했다. 문을 열었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

책상 위에도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았다.

 

희한하게도, 그게 조금 허전했다.

마치 누군가 먼저 켜둔 조명, 따뜻해진 히터, 정리된 대본이 이제는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던 건 아닐까.

그 애가 남기고 간 조용한 친절이, 어느새 익숙해져 버린 건 아닐까.

 

대본을 펴고 앉아 있는데, 한동민이 들어왔다.

평소처럼 조용히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

 

 

나는 무심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괜히 먼저 말 걸고 싶지 않아서였다.

 

아니, 사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그 애는 내 옆에 앉아서 대본을 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펜으로 무언가를 끄적였다. 소리도, 기척도 없는 조용한 움직임.

그 옆에 있으려니 이상하게 긴장이 되어 숨소리마저 의식됐다.

괜히 종이를 넘기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선배.”

“…응.”

“어제 말, 불편했으면 죄송해요.”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 애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펜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불편하진 않았어.”

“…진짜예요?”

“응. 그냥 좀… 생각이 많아졌을 뿐.”

 

 

말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래, 그게 맞다. 생각이 자꾸 많아졌다. 그 애와 마주치면 생각이 늘었고, 그 애가 없으면 괜히 뭔가 빠진 기분이었다.

 

이게 뭔데, 자꾸.

 

 

“동민아.”

 

 

처음으로, 그 애 이름을 불렀다. 입안에서 조심스럽게 꺼낸 이름 하나에 내가 먼저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그 애가 약간은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그때… 내가 울던 거, 기억에 남았어?”

“네.”

“왜?”

“…그게, 무너진 게 아니었거든요.”

“…”

“선배는… 그 순간에도 감정으로 무대에 있었어요.”

 

 

말 끝이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건, 조심과는 조금 다른 무언가였다.

 

확신.

 

동민은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그게 저한텐… 멋있었어요.”

 

 

나는 숨이 잠깐 막혔다. 어디까지가 연기고, 어디까지가 나였는지 구분도 못 하던 그 순간이, 누군가에겐 ‘멋있다’는 감정으로 남아 있었다는 게 이상했다.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네가 이 팀 온 것도, 혹시…”

“네.”

 

 

대답은 빠르고 확실했다. 그 애는 고개를 떨군 채 덧붙였다.

 

 

“그 무대가 시작이었어요. 저한텐.”

“…”

“그날 이후, 제가 하고 싶은 연기가 달라졌거든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책상 위 대본이, 갑자기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내가 그날 떨어뜨렸던 게 대사인지, 감정인지, 아니면 마음인지 모르겠는데—

그걸 주워 간 사람은,

 

이 작은 후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