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실 문 앞에서

05

그날 이후, 연습실에는 예정보다 조금 일찍 도착하게 됐다. 처음엔 대본 더 보려고, 준비운동하려고, 연출 눈치 보이기 싫어서 등 이런저런 핑계를 댔지만, 결국 마음 깊숙한 곳에서 밀어 올려지는 건 하나였다. 한동민보다 늦지 않기. 그냥 그거 하나였다.

 

그런데 매번 도착하면, 그 애는 이미 와 있었다.

 

연습실 문을 열면 먼저 켜진 조명이 눈에 들어왔고, 구석에 펴진 대본과 치워진 의자, 정리된 무대 소품들이 그 애의 존재를 먼저 말해줬다. 내가 따로 할 것도 없었다. 이미 준비는 끝나 있었고, 나는 그저 그 자리에 앉기만 하면 됐다. 불편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상하게 익숙해졌다.

 

며칠 뒤, 내가 혼자 대본을 넘기고 있던 때였다.
책상 맞은편에 앉아 있던 동민이 갑자기 물었다.

 


“선배, 이 장면 바꾸셨어요?”

 

 

나는 손끝을 멈췄다.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들었다.
그 장면은 수정한 지 얼마 안 됐고, 연출한테도 아직 말하지 않은 장면이었다. 어차피 리허설 직전이니까 고치면 되겠지, 싶은 정도였는데… 그걸 벌써 알아챘다는 게 놀라웠다.

 

 

“응. 눈 피해서 말하는 쪽이 좀 더 맞을 것 같아서.”


“그럼, 시선 저한테 안 주시는 거죠?”

“…그럴 예정인데?”

“그럼 저 혼자 감정 잡게 되잖아요.”

 

 

나는 웃음이 터질 뻔해 헛기침으로 넘겼다.

 

“그게 연기야.”

“근데 저 감정 조절 못해요, 그 장면.”

“그걸 왜 나한테 말해.”

“그러니까, 선배가 눈 좀 봐주세요.”

 

 

말끝이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단순한 요청 같기도, 작은 투정 같기도 했다. 그래서 더 곤란했다.
나는 괜히 대본만 넘기며 말했다.

 


“…알겠어. 한 번은 봐줄게.”

 

 

그 애는 고맙다는 말도 없이 고개만 끄덕였고, 나는 괜히 그게 신경 쓰였다. 그냥 주고받은 말인데, 너무 오래 남았다. 시선 한 번 주는 것에 이렇게 말이 많을 일인가 싶으면서도, 그 ‘한 번’이 갖는 무게가 스스로에게도 좀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날 연습 장면은 원래 연출이 유독 공들여 다듬던 신이었다. 서로 감정이 겹치고, 시선이 교차되며, 숨소리 하나로 긴장이 고조되는 구간. 우리는 그 장면을 반복했고, 몇 번을 해도 피로한 기색 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처음 시선을 맞춘 순간, 나는 0.1초쯤 대사를 놓쳤다.
그 애 눈에 내가 있었고, 그 눈 속의 나를 보는 기분이 이상했다.
이건 연기인데, 마치 누가 진심을 꺼내 보여주는 듯한 감정이었다.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연기가 끝나자 나는 깊게 숨을 쉬었다.
동민이 조용히 다가와 물었다.

 


“괜찮았어요?”


“응. 근데…”


“네?”


“너, 좀 그만해.”


“뭘요?”


“그 눈.”


“…어떤 눈이요?”


“…너 알잖아.”

 

 

그 애는 그 말에 짧게 웃었고, 나는 고개를 돌렸다. 들키고 싶지 않아서, 아니, 들켜버렸다는 생각에 이상하게 민망해서.

 

이후로도 연습은 계속됐다.


이상하게도 그 애가 나를 바라보는 순간들만 선명히 기억났다. 무대 조명이 켜질 때마다 그 애가 나를 볼까 봐 긴장했고, 또 동시에 그 애 시선이 아니면 감정선이 어긋나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어느 날은 연습이 끝난 후에도 그 애가 무대 조명을 하나 남겨놨다. 나갈 준비를 하려다 다시 돌아보니, 무대 한가운데 조명이 조용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조명 안 껐어?”


“하나만 더 해보고 싶어서요.”

 

 

그 애는 대본을 들고 내 앞에 섰다. 익숙한 장면이었다. 몇 번이고 반복했던 장면. 그런데, 그날 따라 이상하게 낯설고 설렜다. 그 애가 나를 바라보는 눈이, 연기 같지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다시 무대 위로 올랐다.

연기라고 믿으며, 진심을 숨기며.

 

하지만 속은 자꾸만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진짜 같은 장면이었다.
진심 같은 감정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걸,
계속 연기인 척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