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르륵-. 드르륵-.
캐리어가 매끈한 공항 대리석과 마찰하며 만들어지는 소음이 꽤 맑았다. 흐으음~ 콧노래까지 부르며 열심히 캐리어를 끌고 가는 캐리어의 주인은 어딘가 들떠 보였다.
"흠~ 한국! 나 돌아왔어!"
(흠~ 한국! 내가 돌아왔어!)

강렬하게 물들인 주홍빛 머리카락이 여름 바람을 따라 흩날렸다.
"산은 어디에 있습니까?"
(펠은 어딨을까?)
지민의 입국이었다.
***
으으. 펠이 어려운 단어들이 빽빽히 즐비한 서류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이 종이가 제 손에 있다는 게 다행이기도 했지만, 어쩐지 꼭 이 서류가 저인 것만 같아 기분이 나빴다.
"김태형 바보."
같이 와 주지 못한 태형이 괘씸하기도 했지만, 차라리 나은 일일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덕분에 병원비가 배로 들긴 했으나,
"비밀 유지비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어느새 한국어 패치가 99% 완료된 펠이 한국어로 중얼거렸다.
***
"야야 김석진 뭐하는데!"
"승급 전이었다고. 시발, 버스 태워준다면서!"
태형이 헤드셋을 내팽겨치며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씩씩대는 태형에도 불구하고 석진은 초조하게 핸드폰만 들었다 놨다하고 있었다.
"너 오늘 진짜 좆같게 군다. 뭔데 좀. 말을 해 말을."
태형이 환멸난다는 듯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쥐었다. 저 새끼는 오늘 아침부터 정신이 반쯤 나가있더니, 도저히 돌아올 생각을 안 하냐. 가뜩이나 제 얘기를 안 하는 바람에 왜 그런지 파악하기도 힘든데. 요즘 더욱 이상한 행동만 보여 예측 불가 덩어리가 되어버렸다. 진짜 복잡하게 사는 새끼야.
".....공부하자."
"뭐 이 새끼야?"
"공부하자고. 기말 29일 남았어."
"아니 시발. 이거 웃기는 새끼네? 언제는 머리가 너무 복잡해서 게임을 해야 쓰겄다면서요."
"아니, 공부를 해야겠어."
"아오 진짜 너 존나 노답인 거 알지?"
"응, 공부하자."
"씹새끼..."
맞아, 난 씹새끼야... 라고 넋이 나간 듯 중얼거리는 석진을 태형은 정말 똥씹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시이발... 내가 저런 새끼랑 친구라니. 쟨 나 아니었으면 친구가 없었을 거야.
잔뜩 심술을 부리면서도 얌전히 석진의 손에 끌려온 태형이 이번엔 조용한 스터디 카페로 접어든 석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우리 태형이... 공부 열심히 해야지. 기말 형이랑 파이팅 하자. 적당히 4000시간이면 되겠지?"
석진이 중얼거리며 「스터디 카페 이용 시간」숫자를 4000시간까지 미친듯이 늘렸고, 홀린듯이 결제 버튼을 누르려 하는 것을 태형이 기겁하며 석진의 손을 덥석 잡아채며 말렸다.
"미친 새끼야! 너 진짜 돌았어? 나 시험기간에도 공부 안 하는 거 빤히 알면서 왜 그러냐 진짜."
"혹시 내가 너한테 뭐 잘못했냐? 그런 거면 제발 차라리 화를 내 줘라. 지금 존나 무섭거든?"
태형의 말에 석진이 스터디 카페 무인 정산기에 머리를 쾅- 박으며 중얼거렸다. 시이발... 날 두고... 소개팅... 존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내가 못해 줬나 봐... 내가 있어도 외로운... 하아... 좆 같은 강인석... 타지에 와서 외로운 펠을... 노린 거야... 개애새끼...
석진의 말을 듣던 태형은 의아해 했다. 이 새끼, 펠이 소개팅 나가서 그런 거였어? 아니 근데 무슨 존나 전남친처럼 말하고 지랄이야.
"야 걔도 친구 생기고 남친 생기고 하면 좋지. 뭐가 그렇게 문제냐."
"....."
"아, 뭐. 왜 그렇게 쳐다보는데."
"...하자."
"뭐, 뭘해 임마!"
"그거 있잖아. 드라마에서 나오는 거."
"이거 줄테니까 우리 애랑 헤어져."
태형은 정말로 석진이 미친 건 아닐까 심각하게 고민해야 했다.
***
다음 날.
아이들이 우르르 창가에 매달려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우아, 지렸다. 저 검정색 차 나도 나중에 아빠한테 뽑아달라고 할 거였는데."
"미친. 난 저거 노랑색 갖고 싶었거든."
이목의 주인공은 새카만 스포츠카를 끌고 유연하게 운동장을 회유하다 정문 앞에서 떡하니 멈춰섰다. 그리고 그 안에서 멀끔한 정장 차림으로 나오는,

박지민.
그리고 그 소식을 전해들은 펠은 하던 것도 내팽겨치고 정문을 향해 내달렸다. 미미미친놈이, 한국에선 운전하면 안 된다고!!!
***
저 멀리서 펠이 뛰어나오는 모습을 한 번에 알아본 지민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펠 쪽으로 걸어갔다. 각잡아 입은 정장과 바람에 나부끼는 주홍색 머리결의 조화는 여러 사람에게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펠, 나 보고 싶어?"
(펠, 나 보고 싶었어?)
지민이 빠른속도로 뛰어오는 펠을 낚아채 안아올렸다.
"너 미쳤어? 나 좀 놔줘!"
(미쳤어? 이거 놔!)
"난 너에게 푹 빠졌어."
(너한테 미쳤지.)
"아... 젠장."
(으... 시발.)
"하하. 너 정말 웃기게 생겼어."
(하하. 너 표정 되게 웃기다.)
그제서야 힘든 기색 하나 없이 펠을 내려놓은 지민이 이번에는 둘 다 발이 땅에 붙어있는채로 펠의 어깨에 얼굴을 파뭍으며 안겼다. 펠은 그런 지민이 익숙한 듯 머리부터 등허리까지 부드럽게 쓸어내려 주었다.
"...정말 보고 싶어요."
(정말 보고 싶었어.)
지민이 펠에게 더욱 몸을 안겨오며 말했다. 물론 지민이 키가 더 큰바람에 어정쩡하게 펠이 안기는 꼴이 됐지만.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지민이 드디어 펠에서 떨어져나가며 말했다.
"오늘은 파티하는 날이에요."
(오늘은 파티날이야.)
"무슨 뜻이에요?"
(그게 무슨 말이야?)
"타세요."
(안에 타.)
지민이 위쪽으로 간지나게 열리는 문을 손수 열어주며 말했다.
"하? 내 학교는…"
(응? 내 학교는...)
"괜찮아요. 청소만 마저 하시면 돼요."
(괜찮아. 청소만 남았잖아.)
"감독님께도 말씀드리겠습니다."
(교장선생님께도 말씀 드릴게.)
그렇게 반강제적으로 차에 태워진 펠이었고, 지민은 학교에서 꺅꺅대는 아이들을 뒤로한채로 유유히 학교를 빠져나왔다.
지민은 한국에서 운전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잊은 채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