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엽의 단편모음집

장난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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ㅏ아




아, 


어쩌면



어쩌면 이미 끝나있을지도 모른다고.




*



 


 하루 빨리 차가워지고 싶어 쓸데없는 말은 꾸역꾸역 집어넣어봤자 나올 말은 꼭 나오더라 사람 잘 안 바뀌어. 얼른 정 떼고 떠나는게 좋을텐데. 아니면 한참 뒤에 돌아와선 아예 딴 사람이 되어있는거야. 그동안 내 손안에 놀아난것에 아주 감사합니다. 너무 질려서 이제 가지는 쳐낼게. 엄지부터 새끼까지 줄줄이 매달려있던 붉은 실을 잘라내면 힘없이 무너질 네가 상상되는데 이제 맘도 안아파. 얼마나 우스울까. 고작 사람 하나때문에 저리도 간단하게 부서져버린다는게. 그렇지 않냐, 한여주. 




 내 인생에서 아무도 깊이 들어온 사람은 없다. 근처까지 왔다가 이미 도착한 줄 알고는 좋아하다 금방 다시 침몰하더라. 한편 나는 깊이 들어왔다 나갔다, 자유자재로 드나들어. 정을 줄듯 말듯 애매하게 주다가 꼭 불안하게 만들고. 그런 희생양 중 하나가 한여주였고, 의도하진 않았는데 신나더라. 괜한 권력을 쥔 느낌. 내가 사람 마음을 쥐었다 폈다 치가 떨도록 애절하게 만들어버리는 게. 몇번이고 이야기해도 달라지는 것 없이 즐겁다. 




 그러게 바보같이 왜 날 만났어요. 순탄할 인생 나 하나때문에 망가질 일 있어요? 끈질기죠? 다 알아요. 아니 다는 아니더라도. 하나 정돈 알아. 가끔가다 눈에 띈 마음이 전부 나를 향해있다는 건 알아채기 아주 쉬워. 그럴때마다 반응할까 말까 나름 진중하게 고민해. 내가 너한테 쓰는 시간중 제일 신경을 쏟는 시간. 아. 달달한 말 같은건 그다지 신경 쓸 필요 없어. 생각나는대로 뇌 속에 굴러다니는 단어 조합해 대충 툭 던지면 되는 걸 굳이 머리 아프게 해? 바보같은 짓이지. 내가 지금 개소리하는 것 같아? 
아닐텐데, 여주야. 





 어쩌면 모두가 아닐 줄 알았던 상대도, 적어도 나한테 있어서 이 사람만큼은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사람도 전부 나에겐 아무것도 아니에요. 벽 뒤에서 프레임을 한겹 더 겹쳐 만나는데 그게 정녕 나를 향한걸까? 아니. 프레임이 씌워진 앞의 날 향한거겠지. 항상 명심해주세요. 그건 내가 아니야. 이쯤되면 내 인생에 가짜만 있는 것 같은데. 그건 또 아닌것같아. 진실도 있어- 아니 있었지. 음, 있었어. 있기만 했어. 






 한 번 사랑때문에 대판 싸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난 승산없는 게임은 시작조차 하지 않는다. 너와 지금 하고있는 - 어쩌면 이미 끝났을 사랑조차 그렇게 시작된 거야. 몰랐지 내가 이만큼 쓰레기인지. 내가 잘 숨긴게 아니라 그냥 바뀐거에요. 서서히- 네가 질리는 속도만큼. 







 네가 싫다는 건 아니야. 그렇다고 좋지도 않아. 나는 너 안 싫어해. 질렸을 뿐이지. 원래 다 그래. 하던 게임도 질리면 삭제해버리고, 듣던 음악도 질리면 더 이상 듣지 않고, 자주 가던 음식점의 메인메뉴도 질리면 더 이상 먹지 않는거야. 내 옆에 있던 너도 질려서 더 이상 내 옆이 아닌거야. 질린거야 그냥. 알아들었어? 





그럼 잘 가, 여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