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100에 90할 이상의 기대치를 둔 AI들에게만 이름이 붙여진다. 지금의 김석진과 가장 흡사했던 AI, 정호석. 분명 정호석이 6개월 전 폐기장으로 운송 되는 모습을 내가 봤었는데, 그럴 리가. 하늘에는 지대한 구멍이 뚫린듯 비가 억수 같이 내렸고, 우뚝 솟은 김석진의 당최 알리 없다는 난잡한 표정에 내 마음은 좀 먹히고 있었다. 거룩한 천둥이 한 번 내리쳤다. 말도 안 돼. 장마철이 한참을 지나고서야 급히 내리는 비에 거듭 안면을 구겼다.
"그 종이는 뭐야."

"그게ᆢ."

:김석진 금지구역
ⓒ 2021. 인수분해 All right reserved.
"반가워요."
잡다한 철조품이 있는 곳에 간신히 발은 딛은 석진이 호석이 건넨 손을 덥썩 잡았다. 난해한 얼굴로 눈썹의 사이를 좁힌 호석은 석진이 잡은 왼손을 제 셔츠에 벅벅 닦아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이어 호석은 딱딱한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석진에게 커피 한잔을 내왔다. 들이미는 순간 조차 다정하지 못 했다.
석진은 바싹 타오르는 입술 가까이에 다가온 뜨거운 커피잔에 김이 송글 송글, 습기에 눅눅해지는 제 손 끝을 알지도 못 하고 이만 혀로 훑어댔다. '안 받아요?' 아니요. 그게, 제가. 무슨 욕심인지 석진은 자신이 고작 고철 덩어리라 커피 따위 마실 수 없다 말하지 못 했다.
"아, 못 마시나."
호석은 석진이 답답하다는 듯 저가 신고 있던 갈색 슬리퍼의 밑창을 구부렸다 피며, 꼼짝 못 하고 어물쩍 거리는 석진의 커피잔을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는.
쪼르륵-
녹이 가득한 싱크대 홀에 커피를 흘려보냈다. 석진은 두 종아리를 감싸고는 호석이 맥 없이 쏟아버린 커피가 하릴 없이 흘러가는 소리를 들어내야만 했다. 석진은 가슴을 부둥켰다. 심장이 녹슬기라도 한 듯 삐걱 거린다고 해야했나, 정확히는 뜨겁게 달아올랐고 두근거렸다. 불이 흠씬 나를 덮쳐버린 느낌이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억울한가."
"아니요. 그게 아니라ᆢ."
"나는 왜 당신이 내 자리를 뀄는지 모르겠어. 이것도 못 마시잖아. 나랑 똑같으면서."
호석은 사시나무 처럼 몸을 떨었다. 그 불구덩이 속에서 죽어가던 날을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린다고. 나는 뭐 얼마나 더 대단한 걸 만들었다고 유난인가 했지, 근데 넌 지금 할 수 있는 게 뭐야. 석진은 호석의 말이 끝나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모두 필요 이상의 사치인 걸 알았지만 호석의 말이 저가 고작 기계임을 부각이시키는 것만 같아서였다.
"나갈래요."
"여기에서 달아나면 당신도 내 꼴 나요. 다 잊어버리고 싶지 않으면 내 얘기 똑똑히 들어요."
"ᆢ."
"내가 당신 데이터를 카피 할게. 지금 쥐어주는 종이 바지에 넣어요."

"네?"
고작 철로 이루어진 모함 덩어리 주제 석진에게는 바지 주머니를 더듬는 버릇이 있었다. 호석은 들어오면서 부터 내내 바지주머니를 만지작 거리는 석진에 짜증이 솟구쳤다. 같은 AI인 주제 버릇 따위를 가진 게 샘이 났으니까. 그냥 꼭 인간 같아 보여서. 그 막연한, 머리카락 한 줌을 먹은듯한 껄끄러움에 몸을 잠시 휘청였다.
[호석 씨, JIN 좀 2층으로 데려와 주세요.]
[알겠습니다.]
[이제 초기화 시켜야 하는데 기다려도 안 와서 본부장님이 화나셨어요.]
호석은 USB를 가지고 와 석진의 목 뒤 작은 구멍에 꽂아 넣었다. 이윽고 호석이 USB를 투명한 지퍼백 안에 넣어 찬장 깊숙이 던져버렸다.
"의심 되는 행동 하지말고, 나랑 내내 있었다는 시덥잖은 말도 마요."

:김석진 금지구역
ⓒ 2021. 인수분해 All right reserved.

"무슨ᆢ문제 있나요."
나는 대답하지 못 했다. 도저히 순순히 내어준 이 종이에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어서. 일부러 번지게 만든 듯한 글씨. 석진일까, 그럴리가. 애초에 숨길 것이었다면 종이를 내어줄 필요도, 이유도 없었겠지. 그렇다면 정호석은 언제 이 종이를 쥐어준 거지, 초기화 시키기 전에? 아니면 그 추후에? 후의 이야기라면 석진은 이 종이를 받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전에 쥐어준 것일까.
아니. 애당초 정호석이 살아있을 리가.
다급히 노트북에서 한동안 처박아 둔 정호석의 데이터를 검색했다.
어라?
그 때 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데이터가 모두 0에 맞춰져 있다. 마치 누가 모두 연결선을 고의적으로 끊어낸 것 처럼. 정상적인 수치가 하나도 없었다. 정호석의 데이터 모두가 없어졌다. 신상 부터, 그가 만들어졌던 모든 과정들이, 전부.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이지.
"석진아. 그 종이에 뭐라 적혀있는 지 봤었어?"
"아니요."
그래. 그럴리가. 석진은 고작 기계이다. 어떻게 거짓말 따위를 입에 바를 수 있겠는가. 조급해진 마음에 열병이라도 난 듯 머리가 후덥지근 해졌다. 그래 이것들은 고작 순수 내가 만들어낸 기계덩이일 뿐이다.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오롯이 인간의 움직임으로 작동하는 기계. 괜찮다.
한시름 털어놓았다. 내가 무엇에 지금 생각을 쓰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인지. 영화에서만 나오는 AI들 처럼 이것들은 절대 자신만의 고유의 감정을 가질 수 없다. 단지 입력하에 감정을 흉내낼 뿐.
"평소보다 열이 높아요."
"별 거 아니야. 괜한 걱정 했네."
특히나 지금 기존 입력해놓고, 습득했던 감정 까지 초기화 한 상태에서는 더더욱 그런 짓을 버릴 수 없다. 천천히 고개를 올려 눈 옆을 짚어 눌렀다. 한숨을 푹쉬고는 휴대폰을 찾았다.
[태형아. 정호석 데이터 좀 복원해 줘.]
[있을텐데? 잊어버렸어?]
[아니. 방금 봤는데 다 없어졌더라.]
[그래? 이상하네. 이따 복원해놓을게.]
[응. 고마워.]
괜스레 불안해졌다. 내 몇 년의 고뇌와 번뇌, 노력의 성과들이 무너져 버릴까 봐. 수 없이 사고회로가 멈췄다. 그냥 잠시 합리화 시켜버리기로 했다. 다 괜찮을 것이다.

:김석진 금지구역
ⓒ 2021. 인수분해 All right reserved.

"이상하다. 복원이 안 될 리가 없는데ᆢ."
태형은 자꾸만 먹통인 분석 파일을 덧대어 클릭했다. 계속해 오류라고만 떴으니까. 이걸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정말로? 기계가 아니고서야. 기계ᆢ. 설마.
[이거 복원이 안 돼. 이상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