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오후5시

“ 안 추워요? ”
운전석에서 시선을 도로에 둔 채, 호석이 물었다.
조수석에 앉은 지원은 두 손을 무릎 위에 모으고 고개를
저었다.
“ 괜찮아요. 생각보다 안 추워요. ”
“ 그래도.”
호석은 한 손으로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작게 미소 지으며
무언가를 꺼냈다.
“ 이거. ”
작은 핫팩 하나가 지원의 무릎 위에 내려왔다.
아직 미지근한 온기가 스며들자, 지원은 살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 헉, 이거 언제 챙겼어요. ”
“ 출발하기 전에요, 지원 씨 추울까 봐.”
그 말투는 아무렇지 않은 듯 들렸지만, 지원의 귀끝은
어느새 붉게 물들었다.
“ 고마워요. ”

“ 천만에요. 대신 나중에 커피 사줘요. ”
호석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신호가 바뀐 도로로 차를 몰았다.
잠깐의 정적. 라디오에 잔잔한 기타 소리가 흘렀다.
그러다 호석이 조심스레 물었다.
“ 원데이 클래스 어때요? ”
“ 원데이 클래스요? ”
“ 응. 꽃 만드는 거요. 직접 만들어서 가져가는 거 있거든요.
생각보다 재밌대요. 향기도 좋고, 사진도 잘 나오고.”
지원은 눈을 반짝였다.
“ 좋아요. 그런 거 해보고 싶었어요, 사실. ”
“ 진짜요? 다행이다. 혹시 재미없으면 어쩌나 했는데. ”
“ 호석 씨가 같이 하는데 재미없을 리 없죠. ”
그 한마디에, 호석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햇살이 유리창을 타고 들어와 둘 사이를 따뜻하게 비췄다.
핫팩의 온기보다도, 그 순간이 조금 더 따뜻했다.
차가 멈추자, 호석이 먼저 문을 열고 밖으로 내렸다.
“ 조심해요. 바닥 미끄러워요. ”
지원은 살짝 내려서 고개를 끄덕였다.
공방 앞엔 하얀 간판과 함께 <오늘의 꽃: 라넌큘러스>
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창문 너머로 잔잔한 음악과 꽃향기가 흘러나왔다.
문을 열자, 작은 종소리와 함께 따뜻한 공기가
두 사람을 맞았다.
안쪽엔 파스텔 톤의 벽, 창가에는 말린 꽃다발들이
걸려 있었다.
“ 어서 오세요. ”
밝은 미소의 선생님이 두 사람을 반겼다.
“ 오늘은 커플 플라워 클래스예요. 서로 도와가면서 꽃다발을 만들어볼게요. ”
호석은 살짝 웃으며 지원을 바라봤다.

“ 커플이래요. ”
“아, 아뇨 저희는…” 지원이 급히 손사래를 쳤지만,
선생님은 장난스럽게 “그래도 잘 어울리세요~” 하며 웃었다.
지원은 얼굴이 붉어진 채 자리에 앉았다.
호석은 그런 그녀를 보고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선생님이 여러 색의 꽃들이 들고와 가지런히 놓으셨다.
노란 라넌큘러스, 분홍 튤립, 하얀 안개꽃, 그리고 보라색
스위트피.
지원이 조심스레 손을 뻗어 꽃을 고르자, 호석이
옆에서 물었다.
“ 이 중에 뭐가 제일 예뻐 보여요? ”
“ 음… 이거요. ”
지원이 집어 든 건 연보라색 스위트피였다.

“ 역시. 그거 지원 씨랑 잘 어울려요. ”
“ 또 그런 말… ”
지원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지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꽃을 잡는 방법부터 리본 묶는 순서까지,
호석은 처음엔 서툴게 따라 하다가 금세 감을 잡았다.
“ 이거 이렇게 묶으면 되죠? ”
“ 네, 맞아요. 생각보다 잘하시네요. ”
“ 저 원래 손재주 있어요. ”
“ 자신감은 진짜 많네요. ”
지원이 웃자, 호석도 따라 웃었다.
그 웃음이 테이블 위의 꽃잎보다 더 따뜻했다.
“ 이건 선생님 도움 없이 직접 마무리해볼게요. ”
호석이 리본을 묶으며 말했다.
“ 꽃 만든거로 뭐할거에요? ”
“ 음…” 지원이 잠시 고민하다가, 시선을 호석에게 돌렸다.
“ 비밀이에요. ”
호석은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보라색 꽃잎이 흔들리며, 향기가 두 사람 사이를 가볍게
스쳤다.
“ 아. 뭐야~ 궁금한데요? ”
“ 이따가 알려줄게요~ ”
그 순간, 공방 안의 공기가 살짝 달라졌다.
햇빛이 창문을 타고 들어와 꽃과 두 사람의 얼굴을 부드럽게 비췄다.

마치 정말로, 무언가가 피어나고 있는 것처럼.
.
.
.
“ 꽃도 만들었으니까… 이제 커피 마시러 갈까요? ”
지원이 포장된 꽃다발을 손에 들며 말했다.
“ 좋아요. 어디 갈까요? ”
“ 근처에 애견 카페 있대요. 사모예드 있다던데. ”
“ 사모예드요?! 그 하얗고 복슬복슬한 강아지요? ”
“그 하얗고 복슬복슬한 강아지요?”
지원의 눈이 커졌다.
“ 응. 진짜 크고 순하대요. 지원 씨 강아지 좋아하죠? ”
“ 엄청요! ”
호석은 미소를 지으며 차문을 열었다.
“ 그럼 가야죠. 오늘 데이트 완벽하게 마무리해야지. ”

카페 문을 여는 순간, 부드러운 벨소리와 함께
하얀 털뭉치 하나가 두 사람 쪽으로 달려왔다.
“우와아— 귀여워!”
지원이 본능적으로 무릎을 굽혔다.
거대한 사모예드가 꼬리를 흔들며 그녀 손에 얼굴을 비볐다.
“ 얘 이름은 ‘몽이’래요. ”
호석이 안내문을 읽으며 말했다.
지원은 웃으며 몽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이름도 예쁘다… 털 진짜 부드러워요. ”
그 모습을 보던 호석은 괜히 카메라를 꺼냈다.

“ 가만히 있어봐요, 사진 찍어줄게. ”
“ 지금요? 얼굴 이상할 텐데. ”
“ 괜찮아요. 강아지가 다 커버해줄 듯? ”
찰칵.
화면 속엔 하얀 강아지 옆에서 부드럽게 웃는 지원이 담겼다.
햇살 아래, 꽃다발과 사모예드의 털, 그리고 그녀의 미소가
한 장면처럼 어우러졌다.

“ 예쁘다. ”
호석이 무심하게 중얼거리자, 지원이 고개를 들었다.
“ 그쵸, 강아지가 세상 제일 귀여워요 ”
“…그것도, 그리고.”
“ 그리고요? ”
“ 몰라도 돼요. ”
호석은 급히 시선을 피하며 커피를 주문하러 갔다.
지원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웃음을 참았다.

잠시 후, 따뜻한 라떼 두 잔이 놓였다.
창가에 앉은 두 사람 사이로 사모예드가 고개를 내밀며
턱을 괴었다.
“얘 완전 우리 사이 엄청 들어오려고 하네.”
“ ㅎㅎㅎ 귀여워 ”

호석의 말에 지원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작게 웃었다.
하얀 털이 날리는 오후,
두 사람 사이엔 커피 향보다 진한 공기가 맴돌았다.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