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연인

봄의 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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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하늘, 뭉게구름들의 행진 아래에 김여주가 멈춰 섰다. 그리고 너울거리는 초록빛 나무의 아래에 민윤기가 멈춰 섰다. 뿔테 안경에 무릎까지 오는 치마를 입고 팔에 책을 한 아름 감싸 안고 있는 김여주와 노란 머리에 교복은 잃어버린 건지 사복을 입고 막대사탕을 물고 있는 민윤기가 만났다.



“... 안녕. 나 좀 도와줄 수 있어?”

“... 그래.”



빙그레 웃는 여주의 순수한 웃음에 윤기는 여주를 거절하지 못하고 여주의 품에 있는 책을 같이 들어주었다. 여주는 윤기의 눈치를 보더니 우물쭈물 거리다 입을 조심스레 땠다.



“... 너 3학년 2반이지.”

“... 어.”

“아... 그래.”

“그런데 이거 어디 갖다 놓는 거야.”

“도서관. 나무 밑 벤치에서 읽고 반납하러 가는 거야.”

“... 책. 좋아하나 보네.”

“응. 장르 안 가리고 좋아해.”



파란 하늘의 햇살 같은 여주의 눈꼬리가 예쁘게 휘었다. 그 순수한 눈망울은 윤기의 마음 깊숙한 곳을 아리게 만들었다. 천진난만해 보이지만 보면 고동빛의 눈동자가 깊은 우물에 빠져있었다. 따사로운 봄의 향연이었다.





“여주야 안녕.”

“안녕하세요. 선생님.”

“곧 종 치겠다. 책 두고 갈래?”

“그래도 돼요?”

“그럼.”

“감사합니다.”



여주는 90도로 사서 선생님께 인사를 드린 다음 윤기와 도서관을 나왔다. 여주는 윤기를 보며 도와줘서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사과 맛 마이쮸를 건네주었다.



“너도 내가 도와줄 일 있으면 불러줘. 난 3학년 4반이야.”

“... 그냥 전화번호 줘. 연락할게.”

“어? 응. 알았어. 핸드폰 줘봐.”



윤기는 자신의 전화번호를 꾹꾹 누르는 작은 손과 작은 머리를 힐끔 내려다보았다. 귀여운 동그란 머리통에 윤기는 충동적으로 여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어.”

“... 아. 미안.”

“... 계속해도 되는데.”




윤기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여주의 동그란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윤기에게 다시 폰을 돌려주는 여주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고마워. 연락할게.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여주의 귀에 달콤하게 흘려 들어갔다.






“야, 민윤기. 너 김여주랑 도서관에 있더라?”

“그냥 한 번 도와준 거야.”

“그 찐따 같이 생긴 년한테 관심 있냐?”

“안경 벗으면 예쁠 것 같은데.”

“뭐?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야 라이터 있으면 라이터나 빌려줘라.”

“나 오늘 담임한테 뺏김.”



왜인지 아까 만났던 그 여자아이가 마음을 들쑤시는 것만 같았다. 잔잔한 봄에 큰 파장을 일으키고 무료한 윤기의 봄에 달콤한 바람을 휘날렸다. 그런 예쁜 봄, 예쁜 19살.






“안녕. 또 보네.”

“안경은 어디 갔어?”



여주는 안경을 끼지 않은 채 어제와 같은 순수한 웃음을 지으며 윤기와 인사했다. 윤기는 여주의 고동빛 짙은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사실은 어제 안경을 떨어트려서 두동강 났거든... 어쩔 수 없이 그냥 안경은 집에 두고 왔어.”

“예쁘다.”

“... 어?”

“안경 벗은 것도 예뻐.”

“... 고마워.”



하얗고 투명한 듯한 여주의 얼굴에 홍조가 옅게 올라왔다. 여주는 딴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모른 척했다. 윤기는 여주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꽂아주며 여주와 눈을 맞추었다.



“오늘 하교 같이할까.”

“정말? 너 안 바빠?”

“응. 나보다 너가 더 바쁠걸.”

“그래? 그럼 하교할 때 보자.”



윤기는 저도 모르는 사이 하얗고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와 둥근 두상을 가진 김여주라는 아이에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때 하나 묻지 않은 듯한 하얗고 순수한 그 아이에게.


“윤기야 미안. 좀 늦었지.”

“괜찮아. 별로 안 기다렸어.”

“근데... 너 담배 피우고 왔어?”

“냄새 나나 보네. 담배 냄새 싫어해?”

“응.”

“담배 끊을까.”

“응?”

"네가 싫어하잖아.”


윤기는 빨개진 귀 끝을 매만지며 말했다. 여주도 볼이 붉어진 채 자신의 손끝만 만지작거렸다. 여주는 작게 윤기에게 건강 생각해서라도 끊어 달라고 얘기했다. 윤기는 입동굴을 띄운 채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히 간질거리는 마음과 함께 여주의 손을 조심스레 쥐었다.



“싫으면 놔도 돼.”

“... 잖아.”

“응?”

“... 싫을 리가 없잖아.”



처음 인사를 걸던 모습과는 달리 간질거리기만 한지 윤기의 앞에서는 얼굴이 계속 붉어졌다. 어느새 발걸음은 여주의 집이 운영하는 책방에 다다랐다.



“데려다줘서 고마워. 집 들어가면 연락해.”

“응. 내일 보자.”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봄들의 연속이었다. 둘은 개인적으로 만나는 횟수가 많아지고 점점 가까워졌다. 간단한 애정 표현을 하기도 하는 남들이 흔히 말하는 연애도 시작했다. 연애를 시작한 뒤 여주는 안경을 사지 않고 렌즈를 샀다. 그리고 친구들의 추천으로 교복 치마도 조금 줄였다.



“치마 왜 줄였어.”

“그냥. 줄여보고 싶어서. 일부러 별로 안 줄였어. 과한 건 나도 별로라서.”

“... 그래. 거기서 더 줄이지는 마. 지금이 제일 예뻐.”

“응.”



윤기와 여주는 손을 잡고 한적한 교실에서 서로를 마주보며 웃었다. 학교가 끝난 뒤에는 하루 일과가 되어버린 여주네 책방의 다락방으로 갔다. 여주는 부모님이 서점을 운영하시고 본인이 작은 책방을 운영하고 있다고 했었다. 다락방으로 올라온 뒤 침대에 엎어진 여주 옆에 윤기가 앉았다.



“윤기야. 뽀뽀해줘.”



여주가 본인의 볼을 톡톡 치며 윤기에게 말했다. 윤기의 여주를 본인의 무릎에 앉히고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몇 번 더 짧은 입맞춤을 하고 나서는 아예 여주에게 깊게 입을 맞추었다. 벚꽃이 살랑이는 노을 아래에서 하는 그들의 첫키스였다.



“예쁘다 여주야.”

“... 아. 부끄러워. 얼굴에 열 올라.”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가리는 여주의 손을 붙잡고 여주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진짜 예뻐.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모르는 네 모습까지. 낯간지러운 말에 여주는 윤기의 품에 숨어들었다.



“내 봄은 너로 인해 꽃을 피웠어. 분홍빛의 찬란한 봄.”



윤기가 다시 여주에게 입을 맞추고 혀를 옭아맸다. 너는 알까. 이 시간의 굴레가 영원하길 바라는 나를.


하지만 신들은 이들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여주의 부모님은 봄의 끝자락에 여행을 다녀오다 교통사고로 같은 날 목숨을 잃었다, 이로 인해 여주는 서점과 책방을 같이 관리하게 되었다. 서점은 직원을 더 구해서 학교에 가지 않는 토요일, 일요일에만 왔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윤기와는 만나는 시간보다 연락하는 시간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보고 싶었어."

“응. 나도 윤기야.”



여주는 봄의 첫날처럼 따뜻한 미소가 여전했다. 윤기는 금발의 머리가 길어서 어느새 검은 머리와 노란 머리의 길이가 비슷해지고 있었다. 감히 말할 수 없는 사랑의 우물에 빠져 발버둥 치는 나날들을 여주에게 쏟아부었다.



“근데 너 보니까 살 것 같아.”

“학교에서도 보면서. 어리광만 늘어.”



잔소리와 다르게 여주의 입꼬리는 내려가는 일이 없었다. 오랜만에 윤기와 다락방에서 뒹굴고 사랑도 잔뜩 나누었다. 서로에게 취하는 듯한 오묘한 무색 향기 속에서. 깊어지는 애정만큼 무서운 것이 집착과 소유욕이었을지도.


여주가 결국 자퇴를 결정한 날 윤기와 여주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첫날밤을 가졌다. 그날 윤기와 여주는 약속했다. 우리 20살이 되면 이곳에서 헤어지고, 성공해서 이곳에서 다시 만나자. 그게 언제가 된다 해도 계절을 돌고 돌아 다시 나는 너일 테니.



그래도 우리는 무난하게 계속 만남을 이어갔다. 그날은 없었던 것처럼. 매미가 찌르르 울던 여름도 붉게 물들어갔다. 하복을 입고 빠삐코를 물고 책방으로 들어와 수특을 푸는 검은 머리의 민윤기도 여주에게 익숙해져 갔다. 여주가 책방에 딸린 투룸 집으로 들어가면 전에 여주가 쓰던 책상에서 문제집만 풀고 있던 민윤기가 뒤돌아본다.



“늦었네.”

“응. 자고 갈래?”

“그래.”



여주가 익숙하게 윤기의 잠옷을 꺼내주었다. 잠옷을 받은 윤기는 씻고 나온다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잎이 우리의 사랑처럼 붉게 물들어가는 가을의 계절이 왔다. 매미의 소리보단 귀뚜라미의 소리가 울려 퍼지는 밤에 나란히 누웠다.



“윤기야. 보고 싶었어.”

“나도.”



잎이 푸르르던 봄을 지나 불처럼 뜨거웠던 여름. 여름이 식어가는 가을, 지금 우리도 여름의 열기처럼 식어가진 않을까 무서웠다.



“잘 자. 오늘도 사랑해.”

“나도. 예쁜 꿈 꿔.”



윤기의 품에서 잠드는 여주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진 것처럼 보였다. 윤기는 그런 여주의 머리를 한참 쓰다듬어 주다 여주의 머리에 손을 얹은 채로 잠에 빠졌다.


















"윤기야. 밖에 눈 와."

"진짜네."

"... 12월 31일 이네."

"그러게."

"너랑 10대의 마지막을 보낼 수 있게 되어서 행복해."

"... 근데 너는 나 원망도 안 해?"

"응?"



윤기는 봄처럼 따스하게 웃는 여주에게 무너졌다. 붉어진 눈시울은 눈물을 흘렸다. 눈물을 본 여주의 눈도 어쩔줄을 몰랐다.




"왜 울어 윤기야... 응?"

"내가 수능 준비한다고 늦게 들어온 너를 도와주지도 못 했고, 따뜻하게 안아주지도 않고. 너는 어떻게 나를..."

"윤기야. 나 봐."



눈물로 볼이 촉촉해지고, 눈시울은 붉게 문든 윤기의 흐트러진 얼굴을 마주했다. 눈물들을 조심스레 닦고 윤기의 두 볼을 잡았다.



"우리 다시 그 책방에서 만나는 거야. 그 쾌쾌한 먼지를 털어낸 우리만의 다락방도, 몇 권 안 되지만 같이 돌려읽은 책들도, 우리가 나눈 사랑도 다 그대로일 거야."

"..."

"나에게 따뜻한 봄을 피워낸 건 너였어. 찬란한 마지막 봄. 내 19살은 너였어. 자퇴를 하는 걸 유일하게 반대하지 않은 사람이기도 하고. 내 사랑이자 우상 윤기야. 우리 잠시 시간이 필요하잖아."

"... 응."

"대학 졸업하고 취직하고 멋지게 만나자. 정장 입은 거 보고 싶어. 그때 나한테 훨씬 잘해줘."

"... 사계절을 받칠 만큼 좋아해."



달콤한 고백을 뒤로 입이 맞닿고 혀가 얽혔을 때 새해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낡은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10초 카운트다운. 



3... 2... 1... 해피뉴이어!



"다시 만나자. 몇 년이 지나도 너를 반겨줄게."



나의 봄. 나의 벚꽃이자 10대의 끝자락 윤기야. 감히 너를 사랑한단 말로 내 마음을 다 전할 수 있을까. 사랑은 보내줄 수 있어야 사랑이래. 우리가 안정적으로 지치지 않고 사랑할 수 있을 때 만나자. 나는 아직 잘 모르겠어. 너를 보면 심장이 터질 듯 뛰지만 너의 앞길을 막는 것 같으니까.



교복을 입은 윤기가 뒤돌아 책방에서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끝없는 침묵에 빨려들어갔다.





사랑해. 윤기야.




미안해. 윤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