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간이 흘렀다.
어느덧 담임 선생님이 들어와 종례를 했고, 아이들은 시끄럽게 교실 밖으로 나갔다.
아무도 없는 그 텅 빈 교실에서 턱을 괴고 앉아 책상을 소리나게 쳤다.
잠시 어딘가를 다녀온다는 정국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로 앉아있었다.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멍하니 애꿎은 칠판만을 바라보던 내 시선 끝에는 어느 순간부터 정국의 형상이 잡히기 시작했다.
“... 아, 깜짝아.”
“미안. 늦었지?”
“아니야. 괜찮아.”
또 다시 숨막히는 정적이 시작됐다.
이도 저도 못하고 앉아있었다.

“... 생각은 해봤어?”
“응.”
“그럼 대답해줘.”
“있잖아 정국아, 네가 날 사랑할 자신이 있어?”
“그게 무슨 말이야?”
“... 뭐, 아무것도 아니야.”
차마 정국에게 내 장애를 알리긴 싫었다.
아침에 봤던 수첩을 따르면 아마 과거의 나는 정국에게 호감이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미래의 나는 정국으로 인해 슬플 수도 있기에 현재의 내가 어떠한 선택지를 골라도 결국 언젠가의 나는 아프기 마련.
나는 과거가 그리도 미련하게 그립기 때문에 그저 과거의 나를 선택하기로 했다.
“... 사귀자.”
그렇게 과거와의 계약이, 미래와의 배신이 시작됐다.
/
하교를 할 때는 정국과 갔다.
어색함이 둘을 감쌌지만 나쁘지는 않은 감정이었다.
결국 순간은 과거가 되어버린다.
결국 현재의 나도 과거의 내가 되어 정국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집이 멀다면 더 이상 데려다 주지 않아도 돼. 나는 집이 가까우니까.”
적막을 깬 건 나였다.
“어?”
“보아하니 네 집은 아예 반대편 같은데?”
“... 내가 좋아서 그러는 거니까 신경은 쓰지 않아도 돼.”
“그렇다면 다행이고.”
정국은 마치 수줍은 여고생처럼 볼이 붉어졌다.
“넌 내가 왜 좋아?”

“예뻐서. 그래서 처음 눈길이 갔어. 너에 대해 알고 싶기도 했고.”
“뭐라고?”
나에 대해 알고 싶다는 말에 과민반응을 했다.
결국 ‘나에 대한 것’은 내 장애도 포함되니까.
어쩌면 내 장애를 정국에게 언젠가는 들킬 수 밖에 없으니까.
“왜? 무슨 일 있어?”
“아, 아니야. 내가 그냥 새를 무서워하거든. 저기 저 비둘기 때문에.”
관계 없는 비둘기를 검지로 지목했다.
그러자 정국은 미심쩍은 얼굴로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 이제 집 다 왔다. 데려다줘서 고마워. 조심히 잘 들어가고.”
형식적인 작별인사가 그리도 좋은가보다.
부끄러운 듯 실실 웃는 정국의 꼴이 꽤나 웃겼다.
정국에게서 뒤를 돌아 문을 열고 들어갔다.
현관문부터 복도, 거실, 주방, 안방, 내 방 모두 흰 종이에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아침엔 네 선반 위 분홍색 수첩을 보렴. 저녁엔 그 수첩에 세세한 모든 것들을 내일의 너를 위해 기록해줘.’
아마도 내가 쓴 글 같았다.
방에 들어가 가방 앞 주머니에 들어있던 수첩을 꺼내 오늘 있었던 일을 모두 적었다.
정국과 사귀기 시작한 일, 정국이 한 말 모두를.
그리고 그제서야 잠에 들었다.
/
아침이 밝았다.
어제는 분명히 여름이었는데, 왜 겨울일까.
멍하니 시계만을 바라봤다.
엄마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엄마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 잘 잤어?”
“엄마, 왜 벌써 겨울이야? 분명 여름이었는데. 분명 2018년 7월 5일이었는데 어째서 겨울이냐고.”
“... 2018년은 과거야.”
“그게 무슨 말인데.”
“지금은 2020년이라고.”
오늘은 2018년 7월 6일이 틀림없다.
급하게 휴대전화의 전원을 켜보니 날짜는 2020년 12월 18일을 가리켰다.
“약 먹고 저기 선반 위 분홍색 수첩을 확인해.”
굉장히 기계적인 어투였다.
분홍색 수첩에는 내가 정국과 사귄다는 내용이 적혀있었고, 정국이 했던 말들 또한 기록되어 있었다.
“... 이 꼴로 연애도 하고. 김여주, 기억도 없는데 진짜 김여주 답네.”
나에게 던진 말이지만 말의 목적지는 내가 아니었다.
수첩을 다 보고 알약을 먹으니 시간은 8시가 다 되어갔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어딘가 발걸음이 경쾌했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한 김여주는 연애가 그리도 고팠나보다.
“... 하긴. 기억이 없어도 연애는 할 수 있는 거지 뭐.”
애써 합리화를 하며 집을 나섰다.
수첩에 기록되어있던 그대로 버스에 타고, 무리를 따라 걸어갔다.
“저기요, 커플 김여주씨!”
내 뒤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아마도 나와 친한 여자아이 같았다.
“박소연, 맞아?”
“이번엔 오늘도 맞췄네.”
헛웃음을 친 소연에게 나는 질문을 던졌다.
“너, 나에 대해 알아?”
“네-, 압니다 알아요. 진짜. 이 질문에 대답을 몇 번이나 하는지. 아, 그리고 절대 미안하다고 하지 마. 매일 아침 마다 김여주 사과 받는 게 쉬운지 알아?”
“... 어떻게 알았어.”
“너 어제도 그랬고 2일 전에도 그랬고 1주일 전에도 그랬고 3달 전에도 그랬고... 벌써 2년 6개월이 다 되어가.”
“그렇게 오래 됐구나.”
가방끈을 잡고 시선은 발끝을 향한 채로 천천히 걸었다.
낯선 교실 문을 열자 몇몇의 아이들이 있었고, 창가 쪽 내 자리에 앉았다.
곧이어 ‘전정국’으로 추정되는 남자아이가 들어와 내 뒤에 앉았다.

“잘 잤어?”
“... 어? 정국, 벌써 왔어?”
“응? 무슨 소리야-. 나 원래 이 시간에 오잖아.”
정국의 표정은 어딘가 의심하는 구석이 있어보이는 표정이었다.
“아... 그랬나? 미안.”
실수로 이런 부분은 적지 않았나 보다.
아무래도 정국이라는 아이는 의심이 꽤 많은 것 같으니 더욱 자세한 것 또한 적어야 할 것 같았다.
“... 뭐, 관심이 없었을 수도 있겠지. 여하튼, 오늘 시간 돼?”
“시간? 학교 끝나고?”
“응. 어제부터 사귀었는데 막상 어제는 마땅한 데이트 따위도 안 했잖아.”
“아, 그랬지. 그럼 오늘 학교 끝나고 가자.”
“그래.”
대화를 끝맺기 무섭게 수업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교내 전체를 울렸고, 나는 정국을 향해 있던 시선을 거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