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물다섯 번째 이야기
고깃 씀.
며칠이 지나 시험 기간이 다가왔다. 지난 며칠 사이에 별일은 없었다. 평소와 똑같이 학교에 가고, 알바를 하고, 유성과 만나고 등등… 평소와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전정우의 행패를 겪지 않았다는 것이다. 경찰에 잡혀간 후에 어떻게 됐는지 정국은 궁금하지도 않았다. 형 같지도 않은 사람의 근황 따위 궁금해할 리가 없었다. 정국은 정이 꽤 많지만, 연을 한 번 끊을 때 오래 걸리긴 하지만 한 번 끊으면 얼굴도 보지 않는 그런 칼같은 면을 가지고 있었다.
“야, 정국아.”
집으로 향하던 정국을 태형이 불러 세웠다.
“무슨 일이세요, 형?”
“너 시험 공부는 했냐?”
태형은 자연스럽게 정국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하고 있죠. 형은요?”
“나야 뭐 조금씩 하고 있지.”
“…”
“…”
오늘은 이상하게도 정국이 유난히 힘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일까 더 이상의 대화가 이어지질 않는다. 자연스럽게 어색해진 기류에 태형은 정국이의 어깨에 올려놨던 팔을 스르르 내린다. 정국의 얼굴이 어느때보다도 어두워 보이고 그늘이 져 보인다. 항상 초롱초롱하고 별들을 담은 것만 같았던 눈이 오늘따라 죽어있다. 생기가 전혀 돌지 않는다. 곧 죽을 것처럼.
애인 한정으로 다정한 태형은 그런 정국이 너무 걱정이 돼서 다정하게 무슨 일 있냐며 물어본다. 정국은 아무런 일도 없다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러나 정국의 얼굴은 근심이 너무나도 많아 보이고, 뭔가를 결심했지만 선뜻 할 용기가 나질 않는 듯 보인다. 그리고 그 속에 약간의 사랑이 묻어있는 듯 보인다.
“정국아.”
“네, 형.”
“너 뭐… 애인이랑 잘 안 되니?”
“저한테 애인이 어디 있어요…”
“그때 꽃집에서 네가 말하는 거 들었어.”_20화 참고
“…”
“좀 오지랖일 수도 있는데 너 요즘 너무 힘들어 보여서. 특히 오늘따라 더 힘들어 보여.”
“있잖아요, 형. 형은 애인의 예정된 죽음을 알게 되면 어떻게 할 거예요? 근데 애인은 본인이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눈치예요.”
“글쎄……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잘 해 줘야지. 그리고 난 알려 줄 거야. 너 곧 죽는다고. 본인도 알고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나는.”
“형 답네요.”
“…”
그거 칭찬이야? 라는 농담을 던지기엔 분위기가 너무 무거웠다. 태형 또한 이런 분위기에 그런 농담을 던지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마음도 들지 않았다. 방금 정국이 꺼낸 얘기가 정국과 관련된 이야기임을 눈치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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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봐, 정국아. 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잘 해결하고.”
“네, 감사해요, 형. 조심히 들어가세요.”
태형은 터벅터벅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이며 무심하게 손을 가벼이 흔들었다. 정국은 그런 태형의 뒷모습이 지평선에 잠식되어 없어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그리고 평소와는 좀 다른 태형이의 다정함에 정국은 이질감과 고마움을 느꼈다.
‘띠리릭, 철컥-’
평소와 똑같이 현관문을 열고 곧바로 방으로 향했다. 그리곤 침대에 풀썩 누우며 확 풍기는 친숙하고도 달달한 향으로 마음을 녹였다.
침대로 하여금 심란한 마음을 진정시킨 뒤에 교복을 갈아입으러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무언가가 온몸을 짓누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쌓인 피로 탓일까 정국은 일어날 힘이 나질 않는다. 육체가 계속해서 땅으로 꺼지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침대를 뚫고, 바닥을 뚫고, 땅속 깊은 곳까지 온몸이 잠식되어 가는 것만 같다. 근데 또 그런 느낌이 썩 나쁘지만은 않다. 오히려 편안한 느낌이 든다.
정국은 편안하고 나른한 기분에 눈을 슬며시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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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가벼워지는 것 같은 익숙한 느낌에 정국은 눈을 뜬다. 정국의 눈앞에 사슴같은 눈망울을 하고는 기다리고 있어야 할 유성이 보이질 않는다. 잠시 어디를 간 것이겠지, 라고 여유롭게 생각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이상 정국은 여유로울 수가 없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보이질 않는 유성. 정국의 마음은 점점 더 조급해져만 간다.
“유성아, 유성아!!”
목청 높여 불러보지만 그 어디에도 유성의 모습은 보이질 않는다. 정국은 별의 궤도를 따라 뛰어 보고, 행성들의 궤도를 따라 뛰어 본다. 그리곤 쉴새 없이 유성을 불러 본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정국이의 목소리를 담은 메아리뿐이다.
“유성아……”
정국이의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그리곤 유성이라는 이름을 연신 부르며 그대로 허공에 털썩 주저앉는다. 주위에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지만 정국에겐 아무런 빛도 보이지 않는다. 정국의 세상은 이미 무너져내려 아득하기만 하다.
“정국아.”
육체에 닿자마자 소름이 끼치는 목소리, 그러나 편안하고 달달한 목소리. 정국은 아주 짧게 들었음에도 유성이란 것을 단번에 알아챈다. 정국은 뚝뚝 흘리던 눈물을 두 손으로 대충 닦아내곤 유성에게로 몸을 돌리며 일어난다. 유성은 정국과 마주봄과 동시에 정국이의 눈가에 희미하게 나 있는 눈물 자국을 가장 먼저 본다.
“눈물… 그때처럼 또 눈물을 흘린 거야? 괜찮아?”
유성은 정국을 안아주려 가까이 다가간다. 그러나 정국은 눈물을 마저 닦아내며 유성에게서 뒷걸음질을 친다. 유성은 본인에게서 자꾸 멀어져 가는 정국을 붙잡진 않는다. 그저 저려오는 가슴을 꾹 누를 뿐이다.
둘의 사이는 한없이 어색해져만 간다. 오고가는 말도 없다. 둘 다 입을 다물고만 있다. 누구 하나 입을 열 기색을 내보이질 않는다. 둘의 가슴은 점점 더 멍이 들어만 간다.
“여기 있었구나. 유성아, 정국아.”
신이 그들에게로 다가와 둘의 어색한 기류는 깨진다. 그러나 신의 얼굴이 좋아 보이지 않는다. 항상 여유롭기만 했던 그의 얼굴이 잔뜩 찡그려져 있다. 그리고 잔뜩 일그러진 그의 얼굴은 이내 정국을 향했다.
“정국아, 잠깐 나 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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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화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