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렬했던 고3 첫 날을 뒤로 하고 시간은 점점 흘러갔다. 새학기 적응 기간이랄 것도 없었다. 얘들은 다 작년에 같은 반이었던, 혹은 그 전부터 친했던 얘들이 서로 모여 무리 짓고 다녔고 매 시간 들어오는 쌤들마다 고3으로서 공부 해야 하는 이유를 열거해가며 설명해주는 걸 귀에 박히도록 들었어야 했으니까. 그 사이 민윤기랑도 별일 없었다. 민윤기는 그 날 이후로 내게 가끔 형식적인 인사만 할 뿐, 말을 걸지는 않았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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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앉은 네 명끼리 모둠으로 모이세요.”
중간고사를 앞두어 진도나 팍팍 나가야 할 판에 고3 니네 생기부에 리더십이니, 협동심이니 들어가야 된다며 선생님의 되도 않는 모둠 활동 진행 선언에 난 어이가 털리다 못해 하늘로 승천하셨다. –당연히 진도를 안 나가서 화난 범생이가 아니다. 그냥 모둠 활동이 싫었을 뿐이다.– 이동 수업이어서 다른 반 아이들이 각각 모여 있던 반이기에 반 분위기는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반 모두가 그걸 인식하고 있는지 모둠을 구성하라는 선생님의 말에 대충 근처에 앉은 얘들끼리 느릿느릿 모둠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얼마 전 모의고사 때문에 자리를 하나하나 띄어 두어서 칠판을 기준으로 가로 다섯 줄, 세로는 다섯, 넷씩 뒤죽박죽 자리가 구성되어 있었다. 보통 다른 이동 수업 같았으면 이름 외우겠다고 반별로 모아두고 앉히는데 이 쌤은 그럴 생각은 없는지 오리엔테이션 첫날부터 너희 마음대로 앉으라고 한 쌤이었다. 난 쌤 눈에 띄고 싶지 않았기에 매일 쉬는 시간 일찍 반으로 찾아와 맨 뒷자리 구석에 자리를 맡아 두었다. 근데 그게 화근이었을까?

같은 모둠이 될 줄은 몰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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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이러했다. 나야 맨 뒷자리에 앉아 있으니 별 생각 없이 남는 모둠 가야겠다 생각하고 가만히 있었다. 어차피 앞에서 네 명씩 구성하면 내가 들어갈 자리는 있지도 않았으니까. 그렇게 멍 때리다가 나처럼 맨 뒷자리에 앉은 탓에 모둠 결성을 하지 못한 놈이 누가 있나 하고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
그 많은 이동 수업 과목 중 생윤만 민윤기와 같이 듣는다는 걸 까먹고 있었다. 발도 넓어서 이 반에 아는 사람들만 있는 주제에 맨 뒤에 앉은 그 녀석은 모둠을 만들기는 커녕멀뚱멀뚱 선생님이 서 있는 교탁만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그 날의 일로 굽히고 들어가야 하는 건 나였고, 그런 나에게 화를 내고 짜증을 낼 수 있는 건 저 녀석이었는데 지금 당장이라도 내 역할이 바뀔 것만 같았다. 교탁만을 바라보던 고개가 서서히 내 쪽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 흑빛의 눈동자가 나를 바라본다. 뭘 보냐고 아니꼬운 말이 나갈 뻔했다. 하지만 난 그 사건으로 인한 잠정적 을이었기에 시선을 피하는 거에 그쳤다.
다른 얘들은 벌써 모둠을 구성하고 저들끼리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보겠다고 무어라 말하고 있다. 민윤기와 모둠으로 모여야 한다는 생각에 벌써 진이 빠져 수업 따위 때려치우고 튈까 하는 상념에 빠진 나에게 선생님이 다가와 맨 뒤에 앉은 나 포함 세 명의 학생들을 보며 남는 얘들끼리 모둠 만들라고 말하곤 교탁 앞으로 금방 가버렸다. 절대 싫어, 반항아가 될 테야. 쌤 말 따위 못 들은 척하며 책상 위에 팔을 기댄 채 엎드렸다.
끼익–
오지 마. 제발 오지 마.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제법 거칠었다. 그리고 그 거친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엎드려 자는 연기를 했다. 민윤기랑 대화할 바에 그냥 수업 안 듣는 문제아로 찍히는 게 백 배 낫지. 다 꺼져, 꺼져 제발. 난 자고 있으니까.
의자 끄는 소리가 한 번 더 났다. 이 소리 역시 점점 크게 들려오다가 이내 멈췄다. 누군가 엎드려 있던 내 등을 툭툭 쳤다. 모둠 활동을 하기 싫은 걸 티 내 듯이 난 신경질적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동시에 날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선.


아무래도 모둠 활동 따윈 때려치는 게 맞다.
*
모둠을 짜고, 모둠원 각자 해야 할 역할을 부여하고, 수업을 듣고. 정신 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수업이 끝났다. 근데 왜 모둠장은 내가 된 거지? xx. 욕짓거리가 절로 나왔다. 앞으로 내게 생윤은 생활은 개뿔, 지옥과 윤리가 될 게 분명했다. 그 좁아 터진 책상 하나에 의자를 세 개나 두고 나란히 앉아있는 꼴이 우스웠다. 민윤기는 그렇다 치고 초면인 녀석은 검은색 뿔테 안경에 교복 풀착장. –보통은 고3이라 고등학교 짱 먹었단 이유로 풀어져서 풀사복이 아니면 생활복에 사복을 껴입고 오는데, 교복 풀착으로 온 건 만만치 않은 범생이가 분명했다.– 게다가 내가 민윤기를 바라보는 시선 마냥 얼음장 같은 시선으로 날 쳐다보았던 게 기억에 남았다. 모둠장은 어떻게 하다가 되었더라…
“각 모둠 별로 한 명씩 모둠을 이끌 모둠장을 뽑으세요.“
우리 모둠은 선생님의 말에도 말 한 마디 없이 정적만 유지했다. 이름 모를 뿔테와 민윤기, 그리고 나. 민윤기라면 말을 할 법 했는데 그때는 만인의 타이틀을 쥔 자아가 나오지 않았나보다. 그렇게 몇 분 지나지도 않아서 선생님은 각 모둠마다 모둠장이 누구냐고 물어보았다. 우리의 침묵은 여전했다.
우리 모둠의 침묵은 깨졌다. 깬 건 역시 민윤기였다.
“거기 모둠은 모둠장이 누구니?”
선생님이 우리 모둠을 향해 물음을 던졌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야 이 모둠 안에선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으니까. 몇 초 지나지 않아 암묵적으로 지키기로 했던 모둠의 침묵은 갑작스레 깨졌다. 깬 건 역시 민윤기였다.
“서여주요.”
이게 미쳤나. 민윤기 낯짝을 보아하니 만인의 남자로 다시 빙의한 듯 하다. 뭐가 좋은지 사람 좋아보이는 얼굴로 실실 웃는 게 내겐 소름 돋는 포인트로 다가왔다.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 뿔테를 쓴 녀석에게 시선을 보냈다. 이건 아니잖아. 범생이 네가 해, 제발. 그는 날 한 번 보더니 말 없이 다시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이것들이 단체로 짰나.
진짜 이건 아니지. 이대로 말 없이 내가 모둠장이 될 것 같아 급하게 손을 들었다.
“쌤, 저 말고 얘가 하기로 했어요.”
내가 가리킨 손가락의 주인은 뿔테 안경이었다. –민윤기한테 저 자리를 넘기는 상상을 했는데, 상상 속 놈은 실실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할 것 같아 꼴 보기 싫어서 가리키지 않았다.– 뿔테 안경은 말 한 마디 없다가 선생님이 저를 쳐다보니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선생님은 우리가 사이 좋게 장난치는 줄 아셨는지 말 없이 체크하곤 다음 말을 이어갔다.
“저번 오리엔테이션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첫 번째 수행은 수업 시간에 나가지 않은 내용도 좋으니 윤리적 쟁점 하나를 선정해서 토론하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모둠장은…“
그 이후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정신 없이 보고서 양식을 받고, 주제 정하고, 역할을 정하고, 톡방을 파고... 잠시만. 톡? 급하게 폰을 들어 여러 앱들이 나열된 화면을 응시했다. 찾았다. 노란 앱을 누르니 여러 대화창이 보인다. 그리고 상단에 놓인 그 만인의 이름. 난 망설임 없이 대화창을 눌렀다. 딱히 별 얘기 나누지 않았다. 딱 수행 관련 얘기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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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윤기
https://AFBF.co.kr/dkqndnso/119215
정호석
https://www.djwjrhwjwjrh.kr/jhs193866
https://www.btnews.co.kr/news/btsmldntm
각자 알아서 내용 요약 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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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은 수업 시간 안에서 다 끝낼 수 있기 때문에 그들과 사적으로 만날 일은 없었다. 그냥 학교 잘 나와서 매 시간 활동에 참여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게 뭐가 어렵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