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 술을 얼마나 마신거야? 어제 휴닝이한테 다 들었어"
"..큼, 그나저나 휴닝이 어제 어떻게 알고 온거래"
"너 오랜만에 학교 왔잖아. 근처에 애들 많았나봐 단톡방에서 너 잘생긴 남자랑 술 마신다고 제보 들어옴"
"잘생긴 남자?...아- 태현이"
"죽어도 연애 안 한다더니 이번에는 또 누구야!"
대학교에 들어오자마자 제일 친해진 친구 예원이였다.
모처럼 쉬는 날이라 만났는데 돌아 오는건 잔소리였다.
당연히 나는 귓등으로 들으며 한참 수다를 떠는데 저 뒤에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누-나!"
"..쟤는 또 왜 불렀냐 예원아"
"내가 불렀겠냐."
휴닝카이. 과 후배다. 이런 말 하기 민망하지만 쟤가 지금까지 내게 고백 한 횟수가 벌써 열 번이 넘어가는데..정말 질리지도 않는지 쫄레 쫄레 따라오는 모양새가 강아지 같기도 하고, 나쁜 애도 아니라서 같이 다니고는 있다.
카페에 들어와 신나게 손을 흔든 휴닝이가 빠르게 주문을 하고 내 옆 자리에 앉았다. 그러더니 하는 말은 또-
"누나 진짜 너무해요"
"어? 이번엔 왜 또 너무해"
"내 고백은 받는 족족 차더니 어제 그 남자들은 누구에요!"
"고등학교 친구들이야 고등학교-"
"나랑은 술도 안 마셔주면서..."
그 모습을 본 예원이가 작게 어머, 웬일이야... 라며 손사레를 쳤다. 괜히 할 말이 없어져 커피를 쭈욱 들이키며 핸드폰을 바라봤다. 카톡에 들어가자마자 뜨는 최범규..
최범규, 얘는 뭐지? 정말 나한테 아무런 미련도 없는걸까
"얘들아.. 이거 나 말고 내 친구 얘기인데"
"뭔데"
"오래 사귄 전남친이랑 마주쳤어. 근데 저어어언혀 미련이 없어 보인대. 근데 연락이 자꾸 와. 막 거리낌 없이 아는 척도 해"
"너 최범규한테 연락 왔냐?"
"..아니, 내, 내 얘기 아니라니까??"
저 귀신 같은!... 누가 봐도 내 얘기라고 확신한 저 둘은 턱을 괴고 나름 진지하게 내 얘기를 들었다.
"근데 너네 왜 헤어진거야? 한번도 싸운 적 없었잖아"
"뭐? 우리가?"
..에휴 고등학생 때 봤으면 우리 때문에 기절 했을걸?
그나저나 진짜 어떻게 헤어졌더라.
문득 그 날을 다시 떠올려봤다.
***
"여주야 많이 바빠?"
"범규야 잠시만 나 이것만 마무리 하고"
"응, 나 거실에서 기다릴게"
학교에서 과제로 내어준 리포터를 작성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범규가 들어온지도 몰랐네. 원래 같았으면 침대에 누워 나를 바라보며 기다렸을 텐데 요즘은 먼저 거실에 나가 기다린다는 범규였다.
30분 정도 더 지났을까 거실로 나가자 평소답지 않게 축 늘어진 범규가 보였다. 대충 스트레칭을 하며 범규 옆에 앉으니 손을 꼼지락 거린다.
"요즘 많이 바쁘네 여주야"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그래.. 나 다음주에도 면접 있어서 준비 해야하고,"
"있잖아"
나 영장 나왔어.
뭐라고?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깜짝 놀라 범규를 보았다.
영장이라니..영장?.. 그러면 군대를 가야한다는 말이잖아.
".. 기다려달라는 말은 내가 차마 못 하겠어"
"..어?"
"너 취업 준비 때문에 너무 힘들어 하는거 옆에서 뻔히 다 보이는데 나까지 너 스트레스 주기 싫어"
"너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헤어질까?"
"..."
헤어지자고 하는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죄인 처럼 고개를 푹 숙여 몸을 떠는 범규였다. 딱히 할 말도 없었다.
너가 그러고 있으면 내가 어떻게 해야해 범규야
정적만이 맴도는 이 곳에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내가 여기서 대답을 해야 하는거지?..
"..그래 헤어지자"
***
"어휴 군대랑 취업까지 겹친거면 힘들긴 했겠네"
"몰라 벌써 몇 년 전이야"
"야 내가 봤을 때 둘이 마주치잖아? 빼박 미련 생겨"
"..."
어엉.. 내가 그래. 카페에서 마주친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물론 나도 헤어진 이후로 정신없이 지냈지만 최범규는왜 얼굴에 생기가 도냐고! 나만 힘들었냐고!!
그 때였다.
"야 조연지 너 넘어지면 안 돼! 천천히 좀 걸어라"
"오빠! 나 스무디 마실래 이거 사주라"
"알았어 내가 살테니까 가서 앉아있어"
...뭐야. 딱 봐도 귀여운 여자애와 함께 들어온 범규였다. 새로운 여자친구인가? 꽤나 다정해 보이는 둘의 모습에 얼굴이 경직되었다. 내 눈치를 보는 예원이와 휴닝이가 안절부절 못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괜찮은 척도 못 하겠다. 지금 이 감정은..
"..."
"누나...괜찮아요? 나갈까요?"
"아니야 아니야! 신경 쓰지마 나 괜찮아"
"아무리 그래도 누나가 좋아했던 사람인데"
"헤어진지 얼마나 오래됐는데. 됐어"
사실 죽고싶다. 그냥 뛰쳐 나가고 싶다 시바ㄹ...
최범규 옆에 내가 모르는 여자? 이거 진짜 기분이 김예림 때 급이다. 그 때는 범규가 싫은 티라도 냈지..지금 저 둘은 저들만의 세상이였다.
하아, 착잡하지만 어쨌거나 새로운 여자친구인 것 같으니
나는 신경 쓰지 말아야 하는게 맞아. 잊자 얼른 잊어버리자
"..오늘 나랑 술 마시자"
"으, 미친 진상아!... 어휴, 딱 오늘만이다"
***
여주가 한참 속으로 울고 있을 때 범규는 진땀을 빼며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촌 동생을 보고 있었다. 하 조연지 너 대학 가야돼.. 나 이모한테 맞아 죽는다고!
"오빠 근데 방금 나간 사람들 봤어?"
"..갑자기 공부하다 말고, 누군데?"
"몰라 오빠만 뚫어져라 보던데? 오빠 여친인줄!"
"쓸데없는 소리 말고 공부나 마저 해"
"아니 진짜라니까? 오빠 옛날에 여친 있다고 사진 보여줬잖아. 비슷했어"
움찔-. 그제서야 창문을 바라본 범규가 경직된 자세로 멈춰있었다. 김여주가 왜 저기에 있어? 그리고 왜 나가?
카톡 답장도 안 하더니.. 대놓고 피하는 건가.
범규는 괜히 기분이 상했다.
***
"와..존나..."
존나 쳐진다 기분.. 이렇게까지 텐션이 다운된적은 없었는데. 더군다나 술까지 좋아하는 내가 술 맛이 없었던 적도 없었는데.. 오늘은 진짜 맛대가리가 하나도 없었다.
술과 안주를 두고 깨작거리는 나를 봤는지 예원이가 내 등짝을 때렸다. 아아 아파 왜 때려- 그런 내 투정에 혀를 찬 예원이 입을 열었다.
"솔직하게 말해봐. 너 최범규 아직 좋아해?"
"...이게 좋아하는 감정인지 뭔지 모르겠어"
"지금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건 오지랖인 것 같긴 한데..좋아하는 것 같으면 다시 잘 해봐. 연락 할 수 있잖아 너"
"..."
"아니면 저랑 사귀는 것도 나쁘지 않ㅇ,"
"짠 할까?"
짜아안-! 술잔을 부딪히며 원샷을 하니 휴닝이의 입술이 쭉 삐져나왔다. 삐져도 어쩌겠어 휴닝아 너는 아직 애다 애.
"나랑 술 마셔줘서 고맙다! 오늘 내가 쏠게"
"..언니- 사랑해"
"야 됐어 됐어 징그러워"
계산을 끝낸 뒤 가게를 나오자 예원이와 휴닝이는 택시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혼자 자취를 하기 때문에 걸어가면 금방이였다. 존나 피곤한데 차라리 택시를 타고싶다..
택시가 오자 애들을 챙겨 보낸 뒤 나도 슬슬 발걸음을 옮겼다. 집에 가서.. 언제 또 씻고 언제 또 잠드냐구- 힘들어 죽겠네. 하아, 저 높은 언덕 길을 올라야 한다니 죽을 것 같았다.
"또 술 마신거야?"
"히익- 깜짝아!.."
"뭘 그렇게 놀라. 잠깐 담배 피우러 나온건데"
"...아, 그래? 나는 집에.."
"같이 필래?"
응 너랑 같이 피우고 싶어!!! 하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가라 앉았다. 정신 차리자 쟤는 임자가 있다. 그리고 나 지금 술 마셨고 술김에 무슨 말을 쏟아낼지 몰라
머뭇 거리며 고개를 저으니 대충 알았다며 담배에 불을 붙이는 범규였다. 머리 많이 길었네 범규.. 물론 군대 가기 전에 헤어져서 짧은 머리도 못 보긴 했지만. 미련 버리자-
어색한 정적을 뚫고 집으로 향해 걸어가려는 그 때 등 뒤에서 범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내가 왜 미운데"
"..미안 그 때 내가 취해서 너한테 별 소리를 다 했네"
"궁금했어. 취해서 한 말 같기엔 너무 진심인 것 같아서"
"진짜 취해서 한 소리야 신경 쓰지ㅁ,"
"어떻게 신경을 안 써"
그 말에 뒤를 돌아봤다. 쟤 지금 뭐라는 거야. 순간 열이 뻗쳤다. 최범규 너 왜 그런 눈으로 나 쳐다보냐고.. 오랜만에 가까이서 본 범규의 얼굴에 고등학생 범규가 보였다. 옛날 생각나고 그러네.
"헤어지자고 한 거 너야. 이제와서 사람 마음 가지고 장난 치지 마 최범규"
"...뭐?"
"말 그대로야 너 여자친구도 있잖아. 나도 지금 연락 하는 사람 있어."
"..."
범규가 그 말에 입술을 세게 물더니 담배 꽁초를 버렸다. 그리곤 아무 말 없이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왠지 모르게 그 모습을 다 봐야 할 것 같았다. 연락하는 사람? 당연히 없다. 눈물은 하나도 안 나오는데 마음이 너무 아프네.. 그래도 어쩌겠어 이렇게 안 하면 내가 무너질 것 같은데
대문을 열던 범규가 갑자기 나를 휙 돌아봤다. 아 시발 시선 못 피했다. 그대로 눈이 마주친 범규의 눈에 물기가 젖어 있었다.
"난 한번도 네 마음 가지고 장난친 적 없어."
그 말을 끝으로 집으로 들어간 범규였다. 듣지 말아야 할 걸 들은 기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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