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공주님

#02 기승전 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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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호비나무






02: 기승전 만 원



























".. 들어올래?"

"... ..."




소심하게 내어보인 여주의 말을 뒤로 무거운 정적이 현관을 가득 꾀찼다. 멀뚱히 서 여주를 내려다 보던 정국이 이내 소리없이 웃는다. 비웃음과 비슷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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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방금 감았냐."

".. 으응..?"

"물"




물? 정국의 말을 따라 한 여주가, 정국의 시선을 따라 바닥을 쳐다 보았다. 뚝뚝. 다 마른듯 해보였던 여주의 머리칼 끝에선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한 두 방울 흩어진 물방울이 웅덩이 속으로 끌려간다. 정국의 말을 이해한 듯 아- 하며 멋쩍게 웃어 보인 여주가 팔을 긁는다. 어색해서 나온 어색한 행동이었다.




"어.. 아까 감았는데 다 안 말랐나봐."

"나 온다고 감았냐?"

".. 아니?"

"아니기는-"




누가 봐도 며칠 안 감다가 방금 급히 감은 건데. 혼잣말 치곤 다소 큰 소리로 중얼거린 정국이 신발을 벗고 여주를 피해 집 안으로 들어간다. 정국의 뒤에 가려져있던 여러개의 박스들도 덤으로 현관을 차지했다. 여주에게 썩 좋지 않은 묘한 기분이 슬금슬금 올라온다. 부르튼 여주의 입술이 삐죽 내밀어진다.








[ 나의 공주님 ]








"싫어"

"... 왜"

"내 집이잖아."

"... 내집..?"

"응."




내 집이라고..? 나 김여주 집, 아니 마음 넓게 써서 전정국이랑 김여주 집이라 해주기도 벅찬데. 내 집? 이 집이 왜 전정국 니 집이 되는 거지? 당당함에 순간 수긍을 해버릴 뻔 했던 여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보다 키 좀 크고 힘 좀 세면 다야? 남자랑 여자가 같이 사는데 규칙 하나 안 정한다고? 부르튼 입술이 다시 내밀어진다. 쭈글하게 구겨져 들어가는 미간과 함께, 여주의 얼굴에 인상이 찌푸려진다.





"입술은 왜 내밀어."

"... 아니 약간.. 그건 아니지 싶.. 어서.."

"뭐를?"

"니 집.. 여기 니 집 아니고, 내 집인데.."

"나도 살잖아. 니 집도 되고 내 집도 되고."

"... 그치.."




혼자 살기엔 꽤나 넉넉한 집이긴 하다만.. 가끔 침대가 불편할 때면 앉는 푹신한 여주용 작은 소파에 엉덩이를 붙인 정국이, 어색하게 슨 여주를 올려다보며 싱긋 웃는다. 그럼 됐네. 라면 있냐? 소파에 앉은 폼이 집주인보다 더 편해보여서인지, 입을 뻐끔대던 여주는 뭐라 대꾸도 하지 못 한 채 인상이 스르륵 풀려버렸다. 짜증이 목구멍을 꾹꾹 막히게 만든다. 진짜 뭐 하나만 걸려봐, 집에서 내쫒을 테니까. 몰래 주먹을 꼭 쥔 여주가 정국의 물음에 딱딱한 대답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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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없는데?"

"거짓말을 할 거면 그걸 믿을 상황이라도
만들어야되지 않냐"

"진짜.. 없거든?"

"있으면 만 원."

"뭐? 아니, 잠시만..!"




소파에서 벌떡 일어난 정국이 부얶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선반 위에 떡하니 놓인 라면 봉지를 집어 든다. 정국의 뒤를 졸졸졸 따라 오던 여주의 표정이 경악스럽게 물든다. 내가 저걸.. 아니 저게 왜 저깄지? 어금니를 꽉 깨문 여주가 정국의 눈치를 살살 보자, 라면 봉지를 만지작 거리던 정국이 웃긴다는 듯 피식 웃으며 여주를 내려다 본다. 여주의 시선이 허공을 떠돈다. 먼지 한 톨이라도 찾으면 눈을 둘 곳이 하나라도 생기는 건데, 깨끗한 집이 짜증 날 지경이다.




"만 원."

".. 응?"

"있으면 만 원 주기로 했잖아."

"그거는 네가..!"

"주기 싫어? 그럼 그 대신 나 라면 끓여줘."

"... 차라리 만 원을 줄게."

"그럼 그러던지."

"... ..."




어금니 사이에 씹을 무언가가 들어간 마냥 어금니를 꽉 깨문 여주가 소심한 발걸음으로 제 방에 들어간다. 라면이라도 못 끓이면 화라도 덜 날텐데, 뭐가 그리 쉬운지 척척 찾아 냄비에 물을 담는 소리가 여주의 귀에 쏙쏙 박힌다. 아, 진짜, 쟤, 아악..! 당장이라도 창문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심정을 허공의 발길질로 대신 한 여주가 지갑에서 만 원을 꺼낸다. 파들파들 떨리는 손 끝 만 원이 처량하긴 처음이었다.




"... 이거"

"달라고 진짜 주네."

"... ..."

"너도 라면 먹을래?"

".. 됐,"



꼬르르륵-.



"... ..."

"배는 안 됐다는데?"

"... 끓여주면.. 고맙지..."




만원을 대충 주머니에 찔러 넣은 정국이, 점점 빨개지는 여주의 귀를 보며 소리 없이 웃는다. 얘 뭐야. 존나 웃기네. 라면 봉지 하나를 더 집어 뜯은 정국이 힘 없이 소파로 향하는 여주를 힐끔거리며 웃는다. 아, 웃겨. 물이 끓기 직전, 조용한 정국의 귓가에는 꼬르륵 거리는 소리가 이상하게도 계속 맴돈다.








[ 나의 공주님 ]









"맛있지"

"... 응."




처음 마주한 순간보다 더욱 숨 막히는 정적 속으로 얼큰한 라면 국물이 튀었다. 거실 중앙에 핀 책상 위로 뜨겁게 달궈진 냄비 속에는 라면 두 개가 맛있게 끓여진 채 젓가락 사이를 피해다니고 있다. 이 어색한 분위기를 끊으려 티비를 틀어봤지만, 라면이 코로 들어가는 건지 잡고있는 게 젓가락인지 숟가락인지를 잘 모르겠는 건 여전한 여주였다. 이런 여주에 비해 정국은 계속해서 말을 걸어왔다. 참 인상은 어디 가서 사람 패고도 무표정일 것 같은데, 말은 왜 이렇게 많은지..




"내일 밥은 니가 해 줘."

".. 응.. 어..? 뭐?"

"내일 밥 니가 해달라고."

".. 내가 왜..?"

"... ..."




잘만 삼키던 라면을 이로 뚝 끊은 정국이 동그란 눈을 눈꺼풀로 살짜금 덮었다. 현관에서 여주를 시큰둥하게 내려다 보던 그 표정. 정국의 젓가락이 책상 위로 딱딱하게 놓인다. 탁. 책상에 젓가락 놓이는 소리가 뭐가 그리 무서운 소리라고 어깨를 움찔거리기까지 한 여주가, 정국을 따라 라면을 끊는다. 그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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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 아니.. 저..."




또다시 정국의 눈치를 보는 꼴이 물에 젖은 생쥐마냥 잔뜩 움츠러져 불쌍하기 짝이 없다. 그 심드렁한 표정 그대로 한 쪽 눈썹을 꿈틀거린 정국이, 이내 잘못한 아이의 반성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입을 다문다. 어쩔 줄 몰라 입을 오물거리던 여주가 힘겹게 입을 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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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왜.. 지감자를 좋아.. 하는데.. 너도.."

"... 푸흡."

"... ...."

"뭐, 웨지 감자?"

"... ..."




입에 작게 남아있는 라면을 꿀꺽 삼킨 여주가 젓가락으로 그릇 안을 휘적인다.




".. 내일 밥 뭐 먹을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해 주나?"

"... 시켜 먹자.. 짜장면.."

"나 짜장면 싫어하는데."

"... ..."

"그냥 너도 라면 끓여줘."

".. 어.. 그래.."




내가 한 거보다 맛 없으면 만 원. 답답하던 가슴이 조금이라도 시원하게 내려가려던 찰나, 만 원. 하고 뚝 떨어지는 말에 여주의 가슴이 다시 턱 막혀왔다. 그냥 말일 뿐인데 세게 고막을 맞은 것 같아. 이러다가 나 답답해서 죽는 거 아닐까. 체한 마냥 더부룩하던 속이, 이제는 구멍이 뚫릴 지경인 여주가 어두워진 안색을 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라면이 앞에 있는데도 배부르긴 쉽지 않던데. 왜인지 처량한 자신을 마음 속으로 토닥이며 다시 라면을 입 안으로 욱여넣는 여주이다.










[ 나의 공주님 ]









라면을 다 먹은 후, 정국은 현관에 쌓아 둔 박스들을 열어 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정국은 다 읽은 책이나 선풍기, 각티슈 등 필요하거나 버리기 뭐 한 잡동사니들이 조금 쌓여있던 그 방을 쓰기로 했다. .. 정리 안 해줘도 되겠지. 작은 소파에 앉아 폰을 뒤적이던 여주의 시선이 가끔 정국을 따라 움직인다.




"여보세요."




방과 현관을 오가던 정국이 진동하는 폰에 걸음을 멈춰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정국을 힐끔거리던 여주가 황급히 폰에 시선을 내린다.




"응."

"응."

"... 응."




사실상 할 것이 없어 홈화면과 잠금화면을 오가기만 하던 탓에 여주의 관심은 당연히 정국의 대화에 집중해 있었다. 무슨 대화에 응밖에 없어..? 정국을 쳐다 볼 뻔 한 여주가 물음표를 잔뜩 띄우며 소리에 더욱 집중했다. 터벅터벅. 야. 손가락까지 멈추며 집중한 여주가 달라진 대화에 흥미를 가졌다. 꺼진 폰 액정에 정국이 비친다.




".. 뭐하냐 너."

"... 응?"

"왜 대답이 없어."

".. 나 불렀었어?"

"응. 방금 야라고 불렀어."

"아..."




통화 내용이 아니고 날 부른 거였네. 속으로 중얼거린 여주가 머쓱한 듯 입꼬리를 어색하게 올려 접는다. .. 부르지도 마라고? 이상하게 변해버린 표정에 인상을 쓰며 물은 정국이 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아, 그런 뜻 아니었는데. 슬금슬금 올라간 입꼬리가 착각의 요소라는 걸 뒤늦게 알아챈 여주가 아니라며 작게 말 한다.




"아님 말고."

"응.. 근데 왜 불렀어..?"

"아, 조금 있다가 박지민 온대."

".. 박지민이 누군데?"

"내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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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