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망칠 나의 구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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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른한 일요일 오후 정각 12시, 저항없이 내리쬐는 햇빛의 열기가 후덥지근 했다. 익어가는 무더운 여름에 햇살이 닿은 살갖은 벌겋게 부어올랐고, 구원은 녹다시피 뜨거운 테니스 장 바닥 위에 쨍한 오랜지 색의 라켓을 쥐고 손으로 얼굴만 가린채 널브러져있었다. 땀으로 가득 젖어 사방으로 뻗은 잔뜩 축축한 머리카락과 무더위에 다 헤진 목도리를 두르고 늘어진 구원의 모습은 보기에 기이할 뿐 아니라 괴상했다.


“ 아가씨, 무슨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한여름에 이러고 있으면 쪄 죽어요. 내가 아까부터 조금 지켜봤는데 이러다 진심으로 죽을까봐 하는 말이니 어서 일어나요, 세상에 땀 좀 봐. 그 다 헤진 목도리도 좀 어떻게하고요. 오지랖인가 싶기도 한데 영 내 딸하고 닮은 것이 눈에 자꾸 밟혀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더라고. ”

“ 그냥 내비두세요. 때 되면 알아서 일어나겠지 하고 가던 길 가시라구요. 내가 당신네 딸같던 아니던 아주머니 오지랖이 넓다는 말은 가짜는 아닌것 같으니깐.”

“ 대체 무슨일이 있길래 그렇게 날이 서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가씨 이러다 정말 죽는다니깐. 때 되면 알아서 일어나겠지하고 기다리다가는 아가씨가 이 더위에 쓰러지는게 먼저일 것 같아서 그래요. ”

상관 끄시라고요. 신경질을 내지도 않고는 무안할 정도로 쏘아붙이는 구원의 말에도 한참을 붙들고 늘어져 실랑이를 하더니 결국엔 구원을 일으켜 세워 건물로 들어섰다. 건물 안 온도 차이에 유리창으로 김이 서려 고인 물방울이 하나 둘씩 쓸려 또르륵하고 내려갔다. 쉼 없이 숨을 몰아쉬자 기침이 놀랜 듯 튀어나왔다. 

“ 어이그, 괜찮아요? 물이라도 줄까. ”

“.... 아. 괜찮아요. ”


고요히 정적을 삼키고는 조용히 건네는 거절에도 아주머니는 찬물을 들이밀었다. 구원은 흐르는 눈물을 뒤로하고 물을 받아 그대로 남김없이 모두 삼켰다. 아주머니가 잠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이내 머뭇거리며 편히 쉬라하자 구원은 입술을 깨물고는 소매를 붙잡았다.


“ 혹시.., 지금 바쁘세요? ”

“ 이 노인네가 바쁠 시간이 어디있다고, 할 말 있으면 해요. 시원하게 털어버려야 사람이 개운해지지. ”

구원이 끝내 눈물을 참으며 상설수설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가만 오랫동안, 마냥 잔잔하지 않던 구절을 들어주었다. 




꽤 오랜시간 내 옆에 있어줬어요 그 애는. 
우리 엄마가 아빠를 죽이고 감옥에 가버린 탓에 열 두살 때 고아원에 맡겨졌거든요. 저는 거기 있던 아이들 그중에 제일 밉상이었어요. 아니 밉상 취급을 받았다고 해야 하나. 그냥 버려진 것도 아니고 엄마는 아빠를 죽인 살인자인데, 심지어는 툭하면 윽박지르고 손지검은 일상이었던 매일이 지옥이었으니깐요. 어짜피 모두가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가운데 가장 불쌍하고 안타까운 아이가 필요했고 마침 제가 있었을 뿐이죠. 고아원에서도 여기어지는 취급은 딱히 다르지 않았어요. 비교하자면 강도가 달랐다는 것 정도가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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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원아, 한구원! ”


반복되는 지겨움 속에 어딘가 고장난 인형처럼 멤돌던 나를 그 애가 구해줬어요. 그러니 내가 어떻게 잊겠냐고. 눈에 초점도 없이 허공만 바라보며 의미없이 뱅뱅 돌다가 그 애가 내이름을 부르면 뒤돌아 그 순간 모든 게 눈부시게 바뀌었으니깐.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지 그럼.


이상하게 비가온다던 날씨에도 흰 구름이 뜨문뜨문 하늘을 메웠던 그날, 난 정말 눈 감을 때까지 그 애 얼굴이 너무 보고싶더래요. 그래서 새벽 한밤중에 불렀어. 정말 너무 보고싶어서. 길건너 마중나온 모습을 보고 들떠서 뛰어가는데 다급하게 달려오더니 나를 밀었어요. 난 뒤로 넘어졌고 그 애는 내앞에서 쓰러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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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었어. 날 대신해 죽어가면서, 사실은 죽어가면서, 결국엔 죽는거면서.
미련하게 난 눈물도 못 흘렸어요. 너무 슬퍼서 눈물 하나 흘리지 못하고 소리없이 그렇게 무너져 오열했어요.



난 아직도 이렇게 망가졌는데. 네가 없으면 살 수가 없는데 연준아, 제발. 구원자인줄 알았는데 결국엔 날 망치러 왔던거였어.



눈을 떠 고개를 돌렸을때 여전히 테니스 장이었고 눈앞에 마주한 건 겨울이었다. 옆에는 아무것도 아무도 없는 채로. 어째서지. 내가 본 게 사실 모두 거짓은 아니었을까, 혹은 착각이었나.

더이상 사랑할 자신이 없는데, 난 여전히 널 사랑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