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말의 미안함도,

일말의 미안함도, 1

햇빛이 가장 잘 드는 방 창가에서 끄트머리만 보이는 매화나무 뒤로 스무 걸음 가량의 작은 통로를 따라 걸으면 나오는 곳. 작은 공터였다.
하루의 반 이상을 보내는 소중한 장소였고, 너를 처음 만났던 장소이기도 했다. 전자이기 때문에 나에게 더 특별했는지, 후자의 이유였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여느때와 같이 공터 바닥에 누워 눈을 감고 공상을 했다. 몸에 가득 묻은 흙과 한 몸이 되고 싶었다. 한 몸이 되어 사라지고 싶었다. 여기서 내가 사라져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슬프게도 정말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사라질 이유가 하나 생겼다.


'부모 없는 아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표식어. 학교에선 늘 이름 대신 그렇게 불리곤 했다. 17살이 되자마자 도망치듯 떠나온 이곳엔 적막한 고요 속에 가끔 산속에서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이런 깡촌에서 오래 파묻혀 죽은듯이 지내다보면 가끔 내가 누구인지 잊을때가 있다. 내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래서.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있는 그대로의 날 사랑할 수 없어서. 장원영은 아직도 부모에게 버림받았던 5살에 머물러있다.
지금의 장원영은 이미 죽은 걸지도 몰라. 다시 살릴 수 없을 만큼.



 부스스. - 공터 입구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돌아보았다. 그 곳에. 네가, 쏟아지는 햇빛을 받으며 서 있었다. 온 몸이 상처 투성이였다. 나뭇가지에 긁힌 생채기가 얼굴 여기저기에 나 있었다. 당황스러웠다. 처음 보는 얼굴에, 구질구질한 친척들이 찾아온 것도 아닌 것 같고


"안녕"



멋쩍게 손을 들며 네가 수줍게 인사말을 건네왔다.

어떻게 들어온거지. 여긴 철저히 나만 아는 장소'였는데'. 현재진행형이 이젠 과거형이 되어버렸다.


"누구야?"

"아.. 안유진이라고 해."

"....뭐..?"


 사람에게 한번 버림받은 사람은 또 다시 누군가에게 마음을 내어줄 여유가 없다. 혼자 서있기도 위태한 좁은 세상에 다른 이를 들일 수 없었기에.


 "옆에 앉아도 돼?"
 

네가 예쁘게 웃었다.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더니 곧 내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너 되게 예쁘게 생겼다. 잡아먹고 싶을 만큼"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이걸 칭찬으로 들어야 하나. 
생전 처음 듣는 외모에 대한 칭찬이었다. 어색했다.



"난 네가 웃는 게 더 예쁘다고 생각해"



어느새 내 옆에 앉아서 누가 시작했는지도 모른 채 이야기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있잖아... 나  내일도 여기 와도 돼?"


사실은 내 생각보다 내 세상이 넓을 지도 모른다.






-일말의 미안함도,






한명 쯤은 곁에 두어도 될 만큼의 크기일까. 내 스스로 공간을 좁혀온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더라고 해 도 좁더라도, 불편하게 구겨앉아서라도 너를 들이고 싶었다. 그때는 그랬다. 그럴 용기가 났다.

하루하루. 가끔 네가 너의 가정의 일로 오지 못하는 날도 있었지만 거의 매일 나를 찾아 공터에 왔다. 주로 이야깃거리는 오늘 급식이 뭐였는지. 왜 너는 학교에 안오는지. 이런 얘기들.
너와 추억이 쌓여가는 만큼, 사랑인지 뭔지 하는 감정이 단단해져갔다.


오늘 체육복을 두고가서 큰일날 뻔했다고, 한참을 조잘대는 너의 입술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내 입술을 포개고싶다는. 말도 안되는 망상을 해버렸어. 내 자신을 쥐어 패버리고 싶었다. 


'사랑일까?'


이런 개 같은 질문은 머리속에서 띄운건가. 
내가 감히 너를 사랑할 자격이 있을까? 사랑해도 되는거야? 너를? 

시험해 보기로 했다. 정말 내가 너를 사랑하는지.

네 교복 셔츠를 당겨 너의 시선이 나를 향하게 하고, 네 두터운 입술 위에 내 입술을 포갰다. 뜨겁고, 뜨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