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형이다.
정말... 김태형이었다. 그녀의 앞에 태형이 있었다. 여주의 두 눈에 담긴 태형은 낡아빠진 휴대전화기의 사진 속 인물이 아니었다. 실존하긴 하는가 싶은 영상통화 속 태형도 아니었다. 정말 그녀의 눈 앞에 그가 있었다. 장장 일 년 삼 개월의 긴 공백을 두고 너무나도 보고 싶었던 그가, 좋아하는 만큼 제 품 가득 꼭 안아주고 싶었던 그가.
수만 가지의 감정들이 스쳐지나가며 여주는 곧장 태형에게로 달려갔다. 그의 앞으로 달려간 것 뿐만이 아니라, 그의 품 안에 포옥 안겼다.
"태형이 맞아? 진짜 김태형이야?"
"......"
"... 향 나는 거 보니까 진짜 너 맞구나, 김태형."
그에게서 나는 체취가 그녀의 앞에 있는 게 태형이라는 걸 실감나게 했다. 그래, 유학을 가기 전 그녀와와 등하교를 같이 할 때마다 그에게서 알 수 없지만 좋은 섬유유연제 향이 나곤 했다. 이젠 까마득한 추억이 될 지도 모르겠다, 생각했었는데 정말 내 눈으로 너를 다시 볼 수 있게 될 줄이야.
"왜... 이제 왔어."
"......"
"옷은 왜 이렇게 춥게 입고 왔냐고."
"... 미안."
"진짜 나빴어."
태형은 아무 말이 없다가도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왠일로 안 하던 사과를 다 하고 그래? 외국 공기 마시고 오더니 사람이 무던해진 거야? ... 미안해. 돌아온 답 역시 미안하다는 말 뿐이었다. 반가운 마음 반, 미운 마음 반으로 던진 앙칼진 농담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자 예전 장난기 많던 태형이 맞나 싶기도 했다.
"무슨 일 있어? 뭐 다 미안하대."
"여주야, 나... 너한테 할 말 있어서 왔어."
태형은 폭 안겨있던 여주의 두 팔을 떼어내며 말을 이었다.
"우리 헤어지자."
뭐?

사랑의 궤도
W. 패션후르츠
장장 일 년 하고도 절반을 그에게 내다 바쳤던 여주가 그의 이별통보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몇 가지의 과정을 거쳐야했다. 첫 단계는, 가만히 머리가 정지한 것 같다가도 그가 내뱉은 그의 말을 곱씹기. 내가 과연 제대로 듣는 것이 맞는 지 제 귀를 의심하기도 했지만 그는 확실히 그녀에게 이별통보를 한 것이 맞다. 두 단계, 머릿 속을 맴도는 수십 수백 개의 질문 내던지기. 진심이야? 나를 보고 싶지는 않았어? 헤어지잔 말을 어떻게 이 주년 되기 전날에 할 수가 있어? 아니, 애초에 내일이 우리 만난 지 이 주년이 됐다는 걸 알기는 해? 나를 정말 사랑하긴 한 거야?
진심이야. 내일이 이 주년이란 거, 알고 있었어. 통보를 받는 너의 입장에서는 나 보다 더 많은 비수가 날아와 꽂히는 기분이겠지만 나는 도저히 우리의 이 주년을 축하한 뒤에 너에게 이별을 통보할 수는 없겠더라. 더 늦게 너의 앞에 얼굴을 비추어 주기는 싫었고.
"해외에 나가서 적응을 못 할 때, 너를 보고 싶기도 했어. 하지만, "
"......"
"정작 일 년 삼 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너의 빈자리를 종일 생각하기엔 허무하더라. 그 덕에 너를 대하는 내 감정도 식어가는 걸 느꼈고."
"......"
"얼굴도 안 보고 메세지 몇 자 토독거리면서 헤어지자고 하는 건 도저히 염치가 없어서 직접 말하러 온 거야."
"야, 김태형."

"한두 번 지친 거 아니잖아. 이제 진짜 그만하자, 우리."
"......"
"... 춥게 입은 건 내가 아니라 너인 것 같다."
"......"
"이거 입고 가, 잘 지내."
그는 그가 입고 있던 점퍼를 서스럼없이 여주에게 걸쳐주고선 발걸음을 떼 여주에게서 한 걸음, 두 걸음씩 멀어졌다. ... 이게 끝이야? 우리 진짜 끝? 한 번 붙잡지도 않고 끝?
야속하게도 그는 뒤 한 번을 돌아보지 않았다. 이 상황을 애써 부정하면서도 코 앞인 집을 앞에 두고 춥다며 점퍼를 걸쳐주고 간 태형이 미웠다. 그는 어떻게 이리 매정할 수가 있는지.
매섭게 부는 바람에 시간은 어느새 자정을 넘어섰다. 기여코 이 주년이 된 오늘, 여주는 그에게서 이별을 통보받았다.
불어오는 차디찬 바람에 그의 체취만 더더욱 강해질 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