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따라 유난히 내리던 소나기가 이상하게 슬퍼보이던 날이였다. 따르릉_ 걸려오는 전화를 받고 검은색에 큰 우산을 챙겨 집 앞으로 나갔다. 슬프지만 예쁜, 그런 모순적인 분위기 속 소나기를 헤치고 길을 조용히 걷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혼자 비를 맞기엔 조금 두려운데.
" 비.... 곧 그치겠지. "
" 유여주, 여기. "
날 부르는 중저음의 목소리에 홀린 듯 편의점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곳엔 내 전남친인 김태형이 서있었다. 놀라서 급하게 입을 틀어막고 집으로 향하려던 찰나에 김태형이 내 손목을 꽉 붙잡았다.
" ..... 기다려. "
" 왜. 난 기다릴 이유가 없어, 너가 매달린다고 다시 돌아와주지도 않을 거고. "
" 미안하다고, 많이 사랑했다고. 말 해주려고, 그려려고 왔어. "
" 하.... 일단 집에서 얘기해. 굳이 비 내리는 밖에서 싸우고 싶지 않으니까. "
그렇게 헤어진 전남친을 자취하던 집에 데리고 왔다. 그냥 거기서 끝내고 올걸. 후회가 밀려왔다. 간단하게 김태형이랑 헤어지게 된 이유를 설명하자면 다른 흔한 커플들과 별 다를 바 없었다. 권태기, 그게 이유였다.
바람을 먼저 핀건 김태형이였다. 알바가 끝나고 김태형에게 연락을 하며 길을 걷고 있었다. 처음에는 꿈인 줄 알았다. 내 앞에 있는 저 남자가, 그리고 옆에 있는 여자가. 내 남친과 내 절친이였다. 하필... 하필 왜, 저 사람들이 내 앞에 있는건지 도저히 믿기 싫었다.
김태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얼마 안가 내 앞에 있는 남자도 울려오는 벨소리에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마치 나와 대화하듯,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잘 지내냐, 보고 싶다, 사랑한다 라는 말이 역겹게 들려왔다.
어떻게 이리 사람이 뻔뻔할 수가. 치가 떨려오고 다 끝내고 싶었다. 고3 때도 생각치 않던 한강물 온도가 떠올랐다. 오늘 한강물 온도 몇도지... 쓸데없는 잡생각인 줄 알았는데 내 눈에선 점점 눈물이 고여왔다.
투둑_ 눈에서 눈물이 한방울 씩 떨어졌다. 모든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이대로 멈춰버렸으면 했다.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김태형의 목소리를 눈을 감고 무시한 채 무작정 집으로 달렸다. 발길이 닫는 대로 걷고 뛰기를 반복하니 어느새 집에 도착해 있었다.
..... 그리고 온 연락들을 애써 외면한 채 3마디를 보내고 차단했다. 미안, 우리 헤어지자. 3마디였다. 그렇게 문자를 보내놓고 하루하루를 폐인처럼 살았다. 그렇게 사랑했었는데, 배신감이 들어 말라버린 줄 알았던 눈물샘에서 다시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우리는 그렇게 헤어지게 되었다. 너무 속상하고, 하루하루가 힘들었는데 오랜만에 본 김태형의 얼굴은 너무나 좋아보여서 더 버티기 힘들었다. 힘겹게 꺼낸 첫마디에 돌아온 답에 그냥 이 집에서 나가고 싶었다.
" 그래서... 할 말이 뭔데. "
" ..... 우리 다시 사귀면 안될까..? "
그래, 다 예상했다. 뻔하디 뻔한 전개지.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다시 사귀자고? 왜, 본인이 바람핀 거 아니였나. 사람이 뻔뻔해도 정도가 있지...
" .... 싫어. 지금 내가 이런 쓸데없는 얘기하려고 시간을 보내는 줄 알아? "
" 하.... 그래, 끝내자 그럼. "
" 우린 이미 끝난거였어. 이렇게 굴지 마, 역겨워. "
마지막까지 정말 추했다, 김태형은. 끝까지 본인의 자존심을 내세웠다. 적어도 본인이 바람을 폈으면 용서해달라고 빌어야하는 게 상식 아닌가. 결국 오랜만에 냉장고에 묵혀있던 맥주를 꺼냈다. 치킨을 시켜놓고 맥주를 한 캔 꺼내 들이마셨다.
" .... 오랜만에 술이 참 다네. "
술이 달았다. 직장에서 퇴사할 때도 안 달았던 술인데도 불구하고 달았다, 많이. 한 캔, 두 캔. 세 캔 째 따고 있는데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무시하고 싶었는데 남은 인간관계라도 놓고 싶지 않아 받았다.
" 여보세요? 여주니? "
엄마다. 우리 엄마, 보고 싶은 우리 엄마였다.
" 응 엄마, 엄마 딸 유여주. "
" 딸, 뭐해... 요새 잘 지내고? "
" 으응.... 엄마는, 건강은 어떻고. 좋아졌대요? "
우리 엄마.... 많이 아프시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힘든 일, 쉬운 일이든 뭐든 돈만 되면 나가서 일하셨다. 부모님이 이혼하시고 혼자 날 키우셨다. 아무리 돈 버는 게 힘드셨어도 저녁은 항상 둘이 마주앉아 웃음꽃을 피우며 먹었다. 행복했던 날이 지나고 엄마가 갑자기 쓰러지셨다.
병원에서는 빈혈이라고 하지만 잡병들을 달고 산 우리 엄마여서 당분간 입원을 해야한다고 하셨다. 아픈데도 엄마는 항상 내 생각만 하셨다. 밥은 먹었냐, 건강은 하냐부터 온갖 잔소리지만 그래도 기뻤다. 이렇게 통화하는 게 너무 행복해서.
" 엄마.... 있잖아, 나 엄마가 너무 보고 싶다? "
" 엄마도 우리 딸 많이 보고 싶어... 엄마가 아파서 많이 미안해 여주야. "
" 으으응... 엄마가 왜 미안해, 나 걱정말고 푹... 쉬고 있어요. "
" 알겠어 여주야, 사랑해. "
따뜻했다. 엄마가 말해주시는 사랑해 가. 너무 따듯했다.... 더 보고 싶었다. 밖을 보니 소나기는 점점 그치고 날이 좋아지고 있었다. 차디찼던 소나기가 따듯한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오늘의 소나기는, 금방 지나갈 소나기였나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