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텔톤 초상화
엉겁결에 받게 된 그림

붉은어항
2024.04.08조회수 4
"오늘 진짜 피곤하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집에 가는 길. 시험을 막 끝내고 나온 터라 싱숭생숭하다. 책가방 속 참고서들이 어깨를 짓누른다. 내가 사는 곳은 동네 공원을 가로질러야 갈수 있어서, 가끔 공원 벤치에 앉아 멍을 때리기도 했다. 오늘도 벤치에 털썩 앉았다. 잠시 숨 좀 골라야지.
"와, 날씨 봐라."
쓸데없이 날씨는 좋다. 맞은편 벚나무로 눈길을 돌렸는데 멀쩡한 벤치 놔두고 캠핑 의자에 앉은 사람이 보였다.
"뭘하는 거지?"
그 사람은 철제로 된 이젤을 펴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헝클어진 염색모에 알록달록하게 물감 흔적이 있는 흰색 후드를 뒤집어쓴 그는 자기 옆 나무를 한번 쳐다봤다가 다시 붓을 움직였다. 벚나무를 그리는 모양이다. 평소였다면 관심조차 주지 않았을테지만 지금은 저 그림이 몹시 궁금했다.
"저..기요?"
"....."
가까이 다가가 말을 걸었지만 집중했는지 대꾸가 없었다.
"저기요!"
"아 놀래라!! 왜, 뭐. 저한테 볼일 있으세요?"
화들짝 놀라 토끼눈이 된 남자가 후드모자를 벗었다. 여기서 보니 꽤 어려보이는 사람이었다.
"놀라셨으면 죄송해요. 뭐 그리시는지 보고 싶어서.."
"난 또 뭐라고."
잠시 당황한 듯 싶던 그 얼굴에 금세 화색이 돌았다. 남자는 숨길 기색도 없이 내게 그림을 보여주었다. 난 별안간 탄성을 질렀다.
짙은 초록색 나뭇잎과 가지가 어우러져 생기가 돌아보이는 나무가 도화지 위에 담겨있다. 당장에라도 나뭇잎이 나부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신기하다. 이 나무랑 똑같아요!"
"칭찬받으니 기분은 좋네요."
"받을만 하죠. 잘그리니까."
"으음."
갑자기 날 뚫어져라 보길래 잔뜩 움츠러든 채 눈치를 살폈다.
"..혹시 바쁜 일정같은거 있어요?"
"아뇨."
"그럼 잠깐 시간 좀 내줄래요."
"예?!"
황당한 말에 반응을 제대로 못했다. 내게 뭐 시킬 거라도 있나?
"초상화 그려주려고."
"저를 왜요?"
"자세히 보니 예뻐서."
하마터면 사레 들릴 뻔 했다..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자세히' 보니 라는 부분이 걸리긴 했지만.
"10분만 내 앞에 마주보고 있어요. 그리는데 오래 안걸리니까."
어차피 할 일도 없겠다, 흔쾌히 승낙하고 여분 의자에 앉았다. 그 남자는 순식간에 연필로 밑그림을 완성했다. 손이 엄청 빠르구나.
"이제 맘대로 움직여도 돼요."
스케치를 끝내고 채색에 돌입했다. 물감을 팔레트에 덜어 붓칠하는 과정이 더 오래 걸리는 듯 싶다. 남자는 30분이 지나자 그림을 완성했다며 보여주었다. 부드러운 색감의 피부와 머리카락이 세심하게 표현되어 있다. 실제같지만 몽환적인 분위기도 물씬 풍기는 예쁜 그림이었다.
"와..! 너무 예뻐요."
"맘에 듭니까?"
"당연하죠!! 감사합니다!"
"이정도로 뭘. 전 이제 가봐야겠어요, 점심을 안먹어서."
생글생글 웃으며 인사한 남자는 이젤과 물감, 붓 등을 챙겨 걸어갔다. 대체 뭐하는 사람일까? 내 또래처럼 보여도 나이를 단정지을 수 없다. 그래도 실력은 대단한걸. 그림을 요리조리 살펴보다 도화지 한 귀퉁이에 휘갈긴 글씨를 보게 됐다.
'최연준'
아까 그 사람 이름인 모양인데. 다시 만날 가능성이 있으려나. 이런 그림을 더 볼수 있으면 좋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