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허, 그만하시게. 어린 애를 구박하면 쓰나."
"도,도련님...오셨습니까."
어린 종을 혼내던 어른 종이 고개를 숙이자 분홍빛 도포에 복숭아 꽃이 수놓인 흑청색 답호를 두른 사내가 중문을 넘어 마당으로 들어왔다. 기품있는 8자 걸음과 단정한 옷매무새, 옅은 강물빛 세조대가 묶여 드러난 얇은 허리, 넓직하게 딱 벌어진 어깨와 작은 얼굴이 마치 선녀의 아들이라 해도 모자를 정도였다.
몸 뿐만 아니라 얼굴도 그러했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미소가 떠나지 않는 붉고 도톰한 입술과 잘 익은 복숭아 같은 옅은 홍조, 진한 눈썹에 사슴을 닮은 눈망울, 그리고 백자처럼 희고 깨끗한 얼굴이 옥황상제께서 피와 땀을 흘려 빚었다고 해도 될 미모였다.
거기다 성품까지 올곧았으니 전국 8도에 소문이 자자했다. 질투가 난 남자들은 그에게 반가의 여식이 남장을 한 것이라 욕했다.
"보리 몇톨 떨어졌다고 그러면 쓰나. 떨어진거야 주우면 되니 혼은 필요할 때만 내게."
그 사내가 직접 주우려 하자 소년이 스스로 주워서 다시 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그를 올려다 보자 그는 무릎을 굽혀 앉아 키를 낮추고는 그 소년의 머리를 스다듬어 주었다.
"아무리 그래도 종놈입니다. 손 대지 마십시오. 도련님의 옥체가 더러워 집니다."
"내가 좋아 그러는 거이니 걱정 말게나. 그리고 이 아이에게서 깨끗한 물 냄새가 나는 것을 보아 내가 온다고 어미가 씻긴것 같네."
"아...예, 석진 도련님."
석진은 몇번 더 스다듬고는 그 소년에게 엽전 두 닢을 쥐여주고 일어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소년은 신이 나서 어머니가 있을 부엌으로 달려갔다.
"할아버님은 좀 괜찮으신가?"
"한동안 진지도 잡수시고 큰마님과 뒷 마당에도 가시곤 하셨지만 지금은 하루 종일 누워만 계십니다."
"하...그렇구만. 알겠네. 이만 돌아가보게."
"네, 도련님"
석진은 조용히 사랑채로 향했다. 테사혜를 가지런히 벗어놓고는 방으로 가서 옻칠이 된 서안과 새로 산 책들이 가득한 보자기를 들고 나왔다.
"날 좋은 춘기 인데 꽃향기좀 맡으며 책을 읽어야 겠구나."
-
"도련님."
여자 종이 책을 읽고있던 석진을 부르자 그는 그 자리에서 벌떡일어났다.
"무슨일이냐?"
"이거...다시 가져가 주십시오. 너무 과분합니다."
그녀의 손에 든건 다름 아닌 소년에게 쥐여줬던 엽전 두 닢이었다.
"아, 네가 그 아이의 어미로구나?"
"예, 도련님. 두 푼도 아니고 두 닢이라뇨."
"내가 그 아이에게 준 것은 두 닢이 아니라 그저 돈이 되는 쇳덩이다. 네 아이는 그게 엽전인지 그저 쇳덩인지 몰랐을게다. 그러니 과분하다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감사합니다...도련님."
큰 호통소리에 다들 숨을 죽였다. 아무리 늙고 이빨 빠진 호랑이라도 호랑이이기에 아무도 허튼 말을 할 수 없었다.
"여전하시네요.할아버님."
"네놈이 내 성질을 긁는게냐?"
"석진아, 그 정도만 하고 이제 그만 방으로 들어가거라."
"예, 큰 어머님."
석진이 고개를 숙이고는 방으로 들어가자 대감은 성을 내더니 석진의 큰 어머니와 함께 돌아갔다. 그 모습을 문 틈으로 지켜보던 석진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라더니 주저앉았다.
"으악!...아...너였구나. 오랜만이다, 이화야."
"예, 도련님. 잘 다녀오셨습니까?"
석진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켜준 건 다름아닌 석진의 호위무사 '이화'이었다. 매번 무채색의 옷을 입는 그였지만, 흰 토끼같이 귀여운 얼굴에 담갈색의 머리칼을 가진 그는 석진에게 벗이자 은신처였다.
"그닥."
"문안인사 때문에 사단이 나서 어떡하십니까?"
"그래도 그 자는 만나야지."
석진은 그를 향해 싱긋 웃더니 곱게 접은 종이를 건넸다.
"그 서신을 '탱자'에게 주고 오거라."
"예, 도련님."
그가 나가자 석진은 흑립을 벗고 자리에 누웠다.
"집이 좋긴 좋구나."
-
"이보게, 도화."
"아, 탱자. 깜빡 잠들었네."
"괜찮네, 일어났으니 말이야."
자다 일어나 흐트러진 망건을 다시 동여매는 석진의 맞은편에 검은색 도포에 노란 탱자 열매가 수놓인 주홍색 답호를 두르고 연녹색 세조대를 묶은 사내가 앉아 탱자나무가 그려진 합죽선으로 봄바람을 부치고 있었다.
"봄날씨 참- 좋은데 뱃놀이나 감세. 요즘 꽃이 모두 개화해서 절경이라더군."
"사내 둘이 뱃놀이라니, 사람들에게 욕 보일 일 있는가?"
"어느 누구도 그리 생각 안할걸세. 자네가 여인처럼 꾸민다면 말이야."
그 사내가 이렇게 말하자 석진은 어이가 없는지 뒷목을 글쩍였다.
"...내가?...여장을?"
"내, 옷도 챙겨왔네"
석진의 눈이 향한 곳은 다름아닌 사내 뒤에 놓여있는 주황색 보자기로 싸여있는 검은 나무상자였다. 석진이 난감한듯 '허허' 하며 웃자 사내는 당연하다는 듯 반듯한 서안 위에 떡하니 올렸다.
"갈아입고 나오게. 밖에서 기다리겠네."
"...알겠네. 근데 자네가 더 잘 어울릴텐데?"
"배삯을 미리 치뤄서 이 모습대로 가야 알아볼걸세. 그러니 이해 해주게-."
그 사네가 밖으로 뛰처나가자 석진은 옷고름을 풀다 급하게 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이보게, 박지민!"
"왜 그러나?"
"...아닐세."
석진이 망연자실의 표정으로 들어가자 지민은 그저 웃어줄 뿐이었다.
-
"아아- 좋구나-."
지민이 신난듯 흥얼거리며 노를 젓자 석진은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여장을 안할걸 그랬소..."
"지금이라도 갈아입을 생각이오?"
"...보는 눈이 많은데 그럴리가."
말은 그러면서도 행동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재빨리 도포를 두르고 저고리와 치마를 벗었다. 내의는 원래대로 입고 있었기에 금방 갈아입을 수 있었다.
"잠깐, 도화. 움직임을 멈춰주게."
"왜 그러나, 자ㄴ...?!"
한 순간에 배가 뒤집히고 모든것이 뒤집어졌다. 입술 새로 새어나오던 기포는 점차 줄어들었고 어떻게든 살아 나오려 발버둥 쳤지만 젖은 비단 도포가 이를 방해했다. 이미 물 위로 올라간 지민은 애타게 그를 불렀지만 석진은 점점 물 밑으로 가라앉았다. 일렁이는 햇빛이 점점 흐려져 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