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라는 하루하루가 바빴다. 조금이라도 뭐 하나 떼어먹으러 득달같이 달라붙는 귀족들을 처리해야 했고 진행 중인 사업 때문에도 신경 쓸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 세라야, 너무 혼자서 다 끌어안으려 하지 말거라. 이러다 너 쓰러질 거 같구나. "
남준은 매일매일이 걱정 되었다. 이렇게까지 될 줄 알았다면 임시 가주 따위 시키지 않았을 거다. 물론 세라는 대단할 정도로 잘하고 있긴 하다.
마치 제자리에 앉은 것 마냥 막힘없이 잘 해나갔지만, 몸이 약한 세라가 너무나도 걱정이 되었다. 또다시 세라가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 전 괜찮습니다. "
" 세라야, 이리로 와 봐. "
자신과 대화를 나누면서까지도 일을 손에 놓지 않는 세라에 남준은 세라를 소파에 앉혔다.
" 저 바쁜데, 용건만... "
" 그만 하자. "
" 네? "
" 넌 이제 성인이다. 이제 20살 밖에 되지 않았어. 그런데 내가 너를 망치고 있는 거 같구나... "
" 그게 무슨...! "
" 난 네가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길 바라. 앞으로는 행복하기만 했으면 좋겠단 말이다... "

" 이게 뭐가 평범하지 않다는 겁니까. 이게 카르나 가문의... "
" 왜 그렇게까지 맹목적인 것이냐. "
"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전 복수할 겁니다. 황족 가문이자 대귀족인 우리 가문이 무너지고 있지 않다는 걸 모두에게 똑똑히 보여줘야 된다고요. "
" 난 네가 자랑스러워. 넌 나보다 뛰어난 아이지. 그런 네가 이런 일에 몸을 던지는 걸 원치 않아. 그런 네가 너무나도 아까워. "
" 이게 제 일입니다. 당한 거 아니에요? 어째서... "
세라는 남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가문의 전통, 명예, 위엄을 지켜야 된다는 이 생각들이 세라에겐 독이 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 오라버니 정신 차려. 우린 카르나야. 보여 줘야지,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 "
세라의 독기 가득한 눈빛은 소름 돋게 만들었다.
" ...그래. "
" 이만 가 봐. 오라버니도 바쁠 거 아냐. "
" 응, 수고해. "
남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 지금 네 모습이 예전의 아버지를 떠올 리게 해. "
가문에 맹목적이었고 일 밖에 몰라 자신의 젊음을 버리신 분. 차가우신 그 분은 항상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행복했던 추억이라곤 하나 없이 살아온 사람 같이...
너마저 그렇게 되는 꼴은 볼 순 없다. 내가 어떻게 해서든 널 이곳에서 벗어나게 해줄 거야.
달칵 -
남준이 나갔다. 세라는 문을 지그시 쳐다봤다. 아버지와 닮은 구석이 없는 내가 아버지를 떠올 리게 만든다고?
세라는 남준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게 당연한 게 아닌가? 뭐가 문제 길래 저러는지 모르겠다 정말.
똑똑 -
" 들어와. "
" 대공님, 내일 황궁 회의가 있다고 합니다. "
" 오늘 저녁에 입궁을 하는 게 좋겠군. "
" 준비하겠습니다. "
" 그래. "
황궁 회의. 1년에 몇 번 없는 일이며 이 회의로 인해 많은 것들이 바뀔 수 있는 중대한 회의이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기회구나.
세아는 다짐했다. 본때를 보여 주겠다고.
" 좀 긴장되네. "
아무일 없어야 될 텐데...

마차가 정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급한 일들은 처리를 다 해두었고 나머지는 남준 오라버니에게 맡겼다.
" 갔다 올게요. "
" 조심해야 된다. 거기는 황궁이야. "

" 걱정 마셔. 내가 있는걸? "
기사인 태형은 세라를 호위하기로 했다. 어차피 황궁 기사라 황궁으로 가야 했고, 가족이 1명이라도 같이 있는 게 세라에게 마음이 편할 것이다.
물론 남준의 걱정도 줄어들겠지. 뭐, 아직도 걱정은 커 보이지만.
" 난 괜찮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
" ...그래. 너라면 잘 이겨낼 거라고 믿는다. "
" 갔다 올게요. "
" 조심히 다녀 오렴. "
세라와 가벼운 인사를 건네고 마차를 탔다. 말을 탄 태형은 남준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남준에게 전하는 무언가의 신호였다.
.
.
.
.
" 김세아 대공님을 뵙습니다. "
" 피곤 하구나, 어서 길을 안내해. "
" 따라오십시오. "
황궁에 도착한 세아는 자연스럽게 굴었다. 아버지의 그 모습 그대로를 따라했다.
" 당분간 이 궁녀들이 대공님을 받들 것입니다. "
궁녀들은 자신들을 소개했다. 모두 세아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 그래, 오늘은 이만 나가 봐. 내일 보도록 하지. "
" 네, 알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
세아는 모두가 나가자 편히 소파에 앉았다. 신경 쓸 일이 너무 한꺼번에 몰려서 그런가 두통이 심했다.
" 조금만 더 버티자. 한 달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
세아는 힘이 들어도, 아파도 티를 내지 않았다. 약한 모습을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도 그러셨으니까
.
.
.
.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어렸을 적, 시녀들이 가족들 몰래 나에게만 한끼도 챙겨주지 않은 날이 있었다. 배가 고팠던 난 새벽에 몰래 방을 빠져 나왔다. 부엌으로 가기 위함이었다.
살금살금
들키면 안돼... 최대한 조용히...
조용히 맨발로 긴 복도를 지나 1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갔다. 그런데,
" 후우... "
" ...! "
아버지의 서재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나는 몸을 낮춰 조용히 지나치려고 했다.
" 윽... "
멈칫
내 발걸음은 자연스레 멈췄다. 이러면 안된다는 걸 알면서 서재 앞으로 살며시 다가갔다. 이때 내 나이가 10살 쯤이었을까?
살짝 열린 문 빈틈 사이로 보이는 아버지의 모습. 책상에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 잡고 힘들어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어찌나 힘들어 보였는지, 당장이라도 뛰쳐 들어가 괜찮으시냐고 물을 뻔했다.
이때까지 전혀 아픈 기색 없었는데...
어린 세아의 입장에선 이해할 수 없었다. 늘 강인하고 차갑고 싸늘했던 아버지이었는데... 지금의 모습은,

" 나도 만약 강하지만은 않은가 보오. "
지쳐 보였다. 어머니의 초상화를 바라보시며 애처로운 목소리로 내뱉는 말은 나를 놀라게 했다.
커다란 창문 밖에선 보름달이 어두운 서재를 비추어 주었다. 달빛이 아버지를 비추고 있는 모습은 마음 어딘가를 쑤셨다.
쓸쓸해 보여...
외로운 것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 잘 아는 세아는 슬퍼졌다. 자신에게 관심 하나 없는 아버지지만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괴로워하고 있다는 사실에 아버지를 미워할 수 없었다...
아프지 마세요. 어머니께서 슬퍼할 거예요...
세아는 조용히 방으로 돌아갔다. 잠옷 주머니에 넣어둔 꽃 모양으로 접어둔 종이를 문 앞에 두고 선.
이때부터 일 거다. 과하게 석진 앞에서 애교를 부리고 얼씬 거리기 시작한 게 말이다.
이렇게나마 석진의 곁에 아무도 없는 게 아니란 걸 알려주고 싶었던 어린 세아의 마음이었다.
참 강인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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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