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났다. 카페 문이 열리고 닫히는 순간마다 나는 무심한 척하면서도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 익숙한 발걸음은 들리지 않았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은 오지 않았다. 늘 있던 자리가 비어 있다는 사실이 처음에는 낯설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빈자리가 내 눈앞에 더 크게 자리 잡았다. 창가 끝 테이블은 단순한 가구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그곳 자체가 공백의 형태로 날 괴롭혔다.
다른 손님이 앉을까 봐 괜히 긴장하기도 했다. 누군가가 그 자리를 차지하면, 마치 정국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불안이 엄습했다. 동시에 아무도 앉지 않는 건 또 다른 의미로 무서웠다. 그 자리가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이, 정국이 내게 남기고 간 공허와 똑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커피를 내리고, 주문을 받으며 손은 늘 분주했지만 마음은 그곳에 붙들려 있었다. 가끔은 괜히 눈길이 닿는 게 들킬까 봐 고개를 세게 숙였다. 그런데 그럴수록 오히려 더 크게 의식하게 되었다. 아무도 없는 자리에 내가 스스로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는 걸, 그 사실 자체가 이미 정국을 부르고 있는 증거 같았다.
집으로 돌아가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우면, 빗속에 젖어 서 있던 그의 모습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우산을 나눠 쓰며도 멀게 느껴졌던 거리,
“잘 들어가요”
그리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는 뒷모습. 내가 내뱉었던 잔인한 말들이 되돌아와 가슴을 죄어왔다.
사랑이 아니었다, 짐이었다.
그건 진심이 아니었다.
단지 그때는 내 두려움이 더 컸을 뿐이었다. 하지만 정국은 내 말 속에서 오직 상처만 읽었을 것이다.
나는 그에게 내 마음을 다 보여주지 않았다. 두려움, 후회, 그리고 아직도 남아 있는 끌림까지. 도망치듯 던진 말들이 진짜 마음을 다 가린 채, 나를 더 깊은 후회 속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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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째 되는 날, 문이 열리자 낯익은 기척이 들어왔다.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검은 모자를 눌러쓴 채 들어온 정국은 평소와 똑같은 모습이었지만, 그 무표정 뒤에 숨겨진 감정을 나는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얼굴은 고요했지만, 고요함 속에 무언가 오래 쌓여 있었다.
정국은 카운터 앞에 섰다. 짧게 말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평소와 같은 주문이었지만, 그 말이 전혀 다르게 들렸다. 무심한 듯하지만, 여전히 나를 찾고 있다는 확인처럼 느껴졌다. 나는 손이 떨리지 않게 애써 평정을 가장했다. 얼음을 넣고, 커피를 내리고, 뚜껑을 닫는 일상적인 동작조차 하나하나가 버겁게 느껴졌다. 시간을 길게 늘여 그 순간을 오래 붙잡고 싶었다.
컵을 건네며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뜨겁지 않게 조심하세요.”
말도 안 되는 문장이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에는 뜨거울 게 없으니까. 하지만 그 말 속에는 다른 의미가 숨어 있었다.
괜찮냐고, 잘 지냈냐고.
정국은 그 뉘앙스를 알아챘는지 잠깐 눈빛이 흔들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아주 천천히 끄덕였다.
그가 창가 끝자리로 걸어가 앉는 순간, 카페 안은 다시 익숙한 풍경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게 느껴졌다. 그 자리가 더 이상 비어 있지 않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숨이 덜 막혔다. 나는 안도의 숨을 쉬면서도 동시에 무거운 감정을 떨칠 수 없었다.
내 마음속에서 작은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언젠가는 말해야 한다.
내가 왜 무대에서 무너졌는지, 왜 그 순간 네 손을 잡지 않았는지.
그리고 왜 지금까지 도망쳐 왔는지.
아무리 뒤로 미루려 해도, 언젠가는 그 앞에 서야만 할 것 같았다.
창밖으로 오후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비가 쏟아지던 날의 어둠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유리창 위로 빛이 반짝였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빛을 오래 바라보았다.
빗속에서 끝났다고 믿었던 모든 것들이,
사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천천히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