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국은 오늘도 창가 끝자리에 앉아 있었다. 며칠 전처럼 무심한 얼굴이었지만, 그 무심함 속에는 여전히 나를 기다린 흔적이 남아 있었다. 유리창에 비친 그의 옆모습은 고요했지만, 고요 속에는 오랜 시간 쌓인 감정이 서려 있는 듯 보였다.
나는 더는 모른 척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손에 쥔 트레이가 괜히 무겁게 느껴졌다. 빈 잔을 치우는 척하며 그의 테이블로 다가갔다. 가까워질수록 심장은 불규칙하게 뛰었고, 발끝이 자꾸 멈추려 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물러설 수 없었다.
“그날 이후로…”
내 목소리가 의도치 않게 떨렸다. 그는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숨이 막히는 듯했지만, 더 늦기 전에 말을 이어갔다.
“…다시 무대에 서는 게 무서웠어.”
정국의 눈빛이 흔들렸다.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오래 눌러 두었던 두려움이 비집고 나왔다.
“네가 아니라, 나 자신이 두려웠던 거야. "
"작은 실수 하나로 다 무너질까 봐… 또다시 네 손을 놓칠까 봐.
그렇게 해서 결국 너까지 잃을까 봐.”
말을 내뱉자 눈가가 뜨겁게 젖어들었다. 그동안 숨기느라 버텨 온 감정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듯했다.
무대에서 무너졌던 순간, 조명이 내 실수를 드러냈던 기억, 그 빛 속에서 등을 돌리며 느꼈던 치명적인 상실감까지. 그 모든 것이 한 줄로 엮여 정국 앞에서 고백으로 쏟아졌다.
정국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내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아주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그 손짓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오래 기다린 끝에 내린 확신처럼 느껴졌다.
“알아.”
짧은 한 마디가 내 귀에 닿았다.
“그래서 강요하지 않을 거야. 무대에 다시 서지 않아도 돼. 네가 포기한 게 꿈이라고 해도, 나한테는 네가 여전히 전부니까.”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단했다. 그 말 속에는 원망도, 실망도 없었다. 오직 이해와 수용만이 있었다.
나는 울음을 삼키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무겁게 눌러 있던 짐이 조금은 풀려나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정국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을 이었다.
“그냥 곁에 있게 해 줘. 무대가 아니어도 괜찮아.
너와 같은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해.”
나는 그 말을 오래 곱씹었다. 내 안에서 부서진 꿈과 잔인한 기억들이 여전히 날 붙잡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를 향한 마음도 분명히 남아 있었다.
내가 두려워한 건 결국 무대가 아니라, 내가 또다시 상처받는 일이었고, 그 상처가 그를 밀어내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국은 끝내 내게서 등을 돌리지 않았다.
/
창밖으로 노을이 내려앉았다. 붉은 빛이 유리창을 타고 길게 번지며 두 사람의 그림자를 겹치게 했다. 나는 더 이상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눈물이 번지는 시야 속에서 정국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눈빛 속에는 오랜 기다림이 만들어낸 확신이 담겨 있었다.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포개었다. 따뜻한 온기가 손끝에서 전해졌다. 단순한 접촉이었지만, 그 안에는 우리가 붙잡으려 애써온 모든 것들이 담겨 있었다.
그 순간 알았다.
우리가 지키려 했던 건 무대도,
꿈도 아니었다.
서로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