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잊은 모든 날을 기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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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 시간이 가까워지자 손이 더 빨라졌다. 테이블을 닦고, 우유 스팀 피처를 씻고, 카운터 위를 정리했다. 그가 두고 간 작은 종이봉투는 아직 한쪽에 있었다. 봉투는 가볍고 조용했다. 손으로 들어 올리면 달콤한 냄새가 아주 얇게 새어 나왔다.

 

봉투를 쓰레기통으로 가져갔다가 멈췄다. 뚜껑 위에서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버리면 끝일 텐데.

 

끝이라는 말이 자꾸 목에 걸렸다. 나는 봉투를 가방에 넣고 아무 일 없다는 듯 불을 끄고 문을 잠갔다. 문종이 울리고, 어둠이 카페 안으로 차분히 스며들었다.

 

 

 

나의 작은 방으로 돌아와, 가방에서 봉투를 꺼내 서랍에 넣었다. 서랍을 닫는 소리가 조금 크게 울렸다. 다시 열고, 한 번 더 넣었다. 이번엔 살짝 눌러 닫았다. 기억을 접는 일도 아마 이런 소리였을 것이다. 손바닥으로 서랍 표면을 한 번 쓸고, 불을 끄고 누웠다.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천장에 낮의 장면이 천천히 떠올랐다. 낮고 또렷했던 그의 목소리.. 나는 그 장면을 보지 않으려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더 잘 보이는 밤이 있다.

오늘이 그랬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베란다 창을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들어왔다. 숨이 조금 가라앉았다.

 

 

 

 

다음 날, 알람 소리에 먼저 반응한 것은 손목이었다. 시계를 찾는 손이 조금 서둘렀다. 괜히 헛웃음이 났다. 출근 시간이 넉넉한데도 발걸음은 평소보다 빨랐다. 내가 빨라졌다고 해서 시간이 빨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걷는 내내 문이 열리는 소리를 연습했다. 종이 울리고, 발소리가 들리고, 검은 모자가 들어온다. 나는 카운터에 서 있고, 표정은 평소 그대로. 연습은 긴장보다 항상 늦게 도착한다.

 

오픈 준비를 마치고 한숨 돌릴 때쯤, 문이 열렸다. 모자가 아니었다. 유모차와 동네 어르신들이 먼저 들어왔다. 나는 작은 인사를 건네고 라떼를 만들었다. 컵에 우유를 붓는 동안에도 시선은 자꾸 문쪽으로 흘렀다. 이건.. 버릇처럼 생긴 기대에 가까웠다. 기대라는 단어가 낯설어 나는 속으로 다른 이름을 붙였다.

 

확인. 그냥 확인일 뿐이라고.

 

 

 

그는 평소보다 조금 늦게 왔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걸음은 느렸고, 표정은 언제나처럼 고요했다. 나는 너무 빠르게 고개를 들었다가, 조금 천천히 내려놓았다. 대사는 익숙했다.

 

 

“오늘도 같은 자리 괜찮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 그만큼만.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주문이 이어졌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브라우니는 말하지 않았다. 나도 묻지 않았다. 어제의 봉투가 내 가방 안에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무게를 얻었다. 커피를 내리는 손이 단정해지려는 순간, 그가 낮게 말을 건넸다.

 

 

“어제는 제가 좀 그랬네요.”

 

 

그는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덧붙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말들이 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그런 날 있죠.”

 

 

말을 내고 나서야 내 목소리가 생각보다 부드러웠다는 걸 알았다. 그가 잠깐 웃었다. 그 웃음은 오래 남지 않았지만, 사라지지도 않았다. 얼음 위로 커피가 흘러내리는 소리만 또렷했다. 투명한 잔에서 검은 빛이 차올랐다. 그 장면이 괜히 안정감 있었다.

 

 

그는 창가로 가서 앉았다. 나는 주문을 정리하고 테이블을 닦았다. 오늘은 손님이 많지 않았다. 점심과 오후 사이의 애매한 시간. 음악을 틀까 고민했지만 손이 멈췄다. 스피커는 조용했고 숟가락이 컵에 부딪히는 소리가 가볍게 울렸다.

 

나는 서랍에서 임시 스티커를 꺼내 홀더에 붙였다. 라벨에는 매일 날짜와 날씨를 대충 적어두곤 했다. 오늘은 멈췄다가, 다시 펜을 쥐었다.

 

 

‘맑음 :)’.

 

 

한 글자를 더 쓰고 펜을 놓았다. 혹시라도 누가 읽을까 봐,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가 읽을까 봐, 더 쓰지 않았다.

 

 

 

휴식 시간이 짧게 주어졌다. 직원이 들어와 커피를 받아 갔다.

 

 

“그분 또 오셨네.”

 

 

동료가 웃듯 말했고, 나는 대답 대신 설탕을 한 봉 뜯었다.

 

 

“늘 같은 자리네.”

 

 

동료의 말이 창밖으로 흘렀다.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는 몇 번인가 카운터를 힐끔거렸다. 그 시선을 모르는 척하는 일은 점점 어렵지 않았다. 나는 그 사람이 날 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가 내가 모르는 척하려 한다는 것도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이 묘한 예의는 누구에게 좋은 것인지 가끔 헷갈렸다. 예의라는 말은 가끔 방어와 닮았다. 서로를 다치게 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결국 어디를 긁게 되는지도 모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