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를 조금 넘긴 시간, 그가 계산대 앞으로 다시 왔다. 컵은 비어 있었고 손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리필 드릴까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대신 홀더를 가리켰다. 방금 쓴 라벨이 눈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오늘, 맑아요?”
나는 창밖을 보았다. 하늘은 높은 데 구름은 옅었다. 빛이 유리창을 타고 길게 늘어졌다.
“네. 맑아요.”
이상하게 그 짧은 대답이 내 편이 되어 주는 느낌이었다. 그는 라벨 위 글자를 한 번 더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럼, 괜찮네요.”
괜찮다는 말은 기상 상태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묻지 않는 쪽이 감정을 덜 흔드니까. 그럼에도 궁금증이 아주 얇게 피어올랐다. 얇아서 부정할 수 있을 만큼의 두께였다. 다행히.
그는 그 자리에서 더 머물지 않았다. 문 쪽으로 걸어가다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시선이 짧게 마주치고, 금세 놓였다. 문종이 흔들리고 공기가 바뀌었다. 나는 빈 컵을 정리하며 자리로 돌아왔다. 아무도 없는 창가가 잠깐 넓어 보였다. 햇빛은 조금 더 들어왔다가 금방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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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오후는 평소처럼 흘렀다. 배달이 들어오고, 영수증이 밀리고, 아이스통에 얼음을 채웠다. 손은 바빴고, 마음은 조용했다. 바쁨이 마음을 덮어주는 날에는 내가 덜 흔들린다.
그래서 나는 일을 좋아했다. 일은 항상 나를 한 칸 뒤로 물려 배경으로 만들어주니까. 배경은 다치지 않는다. 전면에 서는 것만이 상처를 만들지. 그리고.. 나는 그걸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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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시간, 가방을 메기 전에 서랍을 열었다. 아침에 넣어 둔 봉투가 누워 있었다. 나는 봉투를 꺼내 잠깐 냄새를 맡았다. 초
콜릿 향이 진했지만 무겁지 않았다. 기억의 냄새는 대개 무겁다. 이건 조금 달랐다. 나는 봉투를 다시 넣지 않았다. 손에 쥔 채 가방에 넣었다. 닫는 소리가 아까보다 조용했다. 조용하다는 건 틈이 있다는 뜻일 수도 있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으려 했다. 그래도 믿는 쪽으로 몸이 조금 기울어졌다.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봉투를 꺼냈다. 창밖이 길게 흘렀다. 가로등이 하나 둘 켜졌다. 나는 한동안 봉투를 열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모서리를 만지작거렸다. 종이의 질감이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버스가 멈출 때마다 마음도 멈췄다. 출발할 때마다 아주 조금 앞으로 움직였다. 그 움직임이 눈에 보이진 않았지만, 손끝에는 분명히 느껴졌다.
집에 도착해 신발을 벗고, 불을 켜고, 물을 한 잔 마셨다. 서랍을 열어 다른 물건들을 옮겼다. 빈칸 하나를 만들었다. 봉투를 그 빈칸에 넣었다가, 꺼냈다. 다시 넣고, 다시 꺼냈다. 나는 웃음이 났다. 바보 같다. 그래도 바보짓은 누구나 한다. 다만 어떤 바보짓은 다치지 않고 끝나면 좋겠다. 나는 봉투를 책상 위에 올려두고 샤워를 했다. 물소리가 벽을 타고 내려왔다. 뜨거운 물은 생각을 잠깐 멈추게 한다. 잠깐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쓴다.
샤워를 마치고 머리를 말리며 창밖을 봤다. 반사된 내 얼굴이 조금 낯설었다. 볼이 약간 달아올라 있었다. 따뜻한 공기 때문일 수도, 초콜릿 냄새 때문일 수도 있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 봉투를 열었다. 조심스럽게 반을 꺼내 냄새를 맡았다. 씹으면 무언가가 터질 것 같은 냄새였다. 나는 베어 물지 않았다. 대신 랩을 꺼내 반을 감쌌다. 나머지 반은 그대로 봉투에 넣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동료에게서 온 짧은 메시지였다.
— 오늘 라벨 귀여웠음. 맑음 :)이라니.
나는 엄지를 움직였다.
— 오늘은 좀 그랬어.
잠시 멈추고 한 줄을 더 썼다.
— 가끔은 괜찮아도 되나 봐.
보내고 나니 허공이 가벼워졌다. 나는 다시 브라우니를 바라보았다. 그건 여전히 달콤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작은 조각 하나가 사람을 과거로 데려갈 수도, 현재로 묶어둘 수도 있다. 내일 아침엔 어떤 쪽일까.
책상에 앉아 조심스레 봉투를 열었다. 작은 브라우니를 꺼내 반으로 갈랐다. 단면에서 달콤한 향이 더 짙어졌다. 한 입 베어 물었다. 부드러운 식감이 입 안에서 천천히 풀렸다. 목으로 넘기는 순간, 오래 닫아 두었던 문이 아주 조금 열리는 기분이 들었다.
달콤한데, 그 안에 묘하게 쓴맛이 섞여 있었다. 그 쓴맛이 과거에서 온 것임을 알면서도, 이번엔 뱉지 않았다. 남은 조각을 천천히 씹었다.
서랍 대신 식탁 위에 빈 봉투를 두었다. 그리고 의자에 기대어 숨을 고르며 생각했다. 아마, 조금은 괜찮아도 되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