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잊은 모든 날을 기억해

7

비가 왔다.


아침부터 내리던 빗줄기는 오후가 되자 점점 굵어졌다. 유리창에 부딪히는 소리가 마치 의도적으로 더 크게 들렸다. 카페 안은 손님이 거의 없었다. 가끔 우산을 접고 들어오는 사람들의 어깨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바닥에 깔린 회색 매트가 금세 젖어갔다. 나는 걸레를 쥐고 몇 번이나 닦았다. 그럼에도 내 마음은 젖은 매트처럼 무겁고 늘어져 있었다.

 

문이 열렸다. 그는 우산을 접지도 않은 채 그대로 들어왔다. 검은 후드가 젖어 있었다.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곧장 카운터로 와서 눈을 맞췄다. 평소 같으면 모자를 더 눌러쓰거나 말없이 시선을 돌렸을 텐데, 오늘은 정면으로 나를 바라봤다.

 

빗소리 때문에 목소리가 조금 묻혔지만, 나는 분명히 들었다.

 

 

“오늘은… 따뜻한 걸로 할게요.”

 

 

나는 반사적으로 버튼을 눌렀다. 에스프레소가 추출되는 소리, 스팀이 분무처럼 터지는 소리, 빗소리와 뒤섞여 묘한 리듬을 만들었다. 잔을 내밀려는 순간, 그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오늘은 그냥 여기 앉아도 돼요?”

 

 

나는 잠시 멈췄다. 카운터 안이 아니라, 손님이 앉는 자리. 그와 같은 공간에 오래 머무는 일이 두려웠다. 하지만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졌다. 그가 창가 대신 카운터 앞 스툴에 앉았다. 낯선 광경이었다. 늘 거리를 두던 그가 오늘은 바로 앞에 있었다.

 

나는 손에 힘을 주어 머그컵을 건넸다. 뜨거운 김이 올라왔다. 그의 손끝이 컵을 감쌌다.

 

 

“라벨은 안 써요?”

 


그의 시선이 컵 홀더 쪽으로 향했다. 나는 펜을 잡았다. 뭘 써야 할지 고민하다가,

그냥 한 단어를 적었다. 비.

 

 

그는 그 글자를 읽더니 웃었다.

 

 

“맞네요. 오늘은 비네요.”

 

 

그 웃음이 이상하게 나를 흔들었다. 평소보다 조금 더 젖어 있고, 그래서 조금 더 솔직해 보였다. 나는 시선을 피하려 했지만 그는 끊임없이 눈을 맞췄다. 마치 오늘은 피하지 말라는 듯이.

 

 

“왜 모른 척했어요?”

 


그의 목소리가 조용히 파고들었다. 피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나는 한순간 숨이 막혔다. 컵을 닦는 척했지만 손이 떨렸다.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어요.”

 


억지로 웃으며 대답했지만 목소리가 너무 약했다.

정국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알잖아요. 우리 같이 춤췄던 거. 같은 무대에 서려고 발바닥이 닳도록 연습했던 거. 난 다 기억하는데, 왜 당신만 없는 사람처럼 굴어요?”

 

 

그의 말이 창밖의 빗소리보다 더 크게 들렸다. 오랫동안 밀어냈던 기억들이 강제로 끌려나왔다. 연습실의 거울, 울음 섞인 웃음, 그리고 마지막으로 등을 돌리던 순간까지. 나는 두 손으로 카운터를 잡았다. 어깨가 저절로 떨렸다.

 

 

“그만해요.”

 


짧지만 단호한 목소리였다.

 


“난 다 잊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어요. 다시 꺼내면 안 되는 거예요.”

 

 

정국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만 잊은 거예요. 난 못 잊었어요. 아니, 안 잊었어요.”

 

 

숨이 막혔다. 오랫동안 두려워했던 순간이 눈앞에 현실로 나타났다. 나는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발이 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정국은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빗물이 묻은 후드에서 물방울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 소리가 유난히 또렷했다.

 

 

“그때 당신이 사라지고 난 뒤에도, 난 계속 춤췄어요. 무대에 서는 게 지옥 같아도, 끝내고 나면 항상 당신 생각이 났어요. 난 아직도…”

 

 

그의 목소리가 잠시 끊겼다. 숨을 고르고 다시 이어졌다.

 


“…당신이랑 같은 무대를 꿈꿔요.”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눈가가 뜨겁게 젖어드는 걸 느꼈다.
억지로 삼켜왔던 기억들이, 그와 함께 쌓아 올렸던 꿈들이, 무너져 내리듯 한꺼번에 몰려왔다.

 

 

비는 점점 더 세차게 내렸다.
카페 안은 조용했지만, 내 가슴 안은 거칠게 요동쳤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정국의 눈빛이 여전히 내 얼굴을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내가 아무리 외면해도, 그와의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