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문을 나서자 비가 이미 거리를 잠식하고 있었다. 우산을 챙기려던 순간, 현관 옆에 서 있던 정국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이미 자신의 우산을 펴고 있었고, 나를 한 번 바라보더니 말없이 손잡이를 조금 더 안쪽으로 당겼다.
“그냥 같이 가요.”
그의 말은 질문이 아니라 선언에 가까웠다. 거절할 틈도 없이, 빗줄기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거세졌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우산 아래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깨가 스치고, 차가운 공기와 그의 체온이 가까워졌다.
우산은 좁았고, 빗방울이 계속 우리 양옆을 파고들었다. 가로등 불빛은 물 위에 번져 흐려졌고, 그 아래를 걷는 우리의 발걸음은 묘하게 같은 속도를 맞췄다. 우산 아래 공간은 좁았지만, 그만큼 침묵은 더 크게 울렸다. 정국은 한참을 내 옆에 서 있다가 결국 낮게 물었다.
“왜 그렇게 모른 척했어. 다 기억하면서.”
나는 숨이 막혀 대답이 늦었다. 그러나 더는 피할 수 없었다.
“…네가 아니라, 나 자신이 무서웠던 거야.”
정국의 시선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무서웠다고? 뭘 그렇게까지 두려워했는데?”
나는 비에 젖은 도로 위에 시선을 떨어뜨렸다. 발끝이 물에 잠기며 차갑게 파고들었다.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장면들이 억지로 떠올라 가슴을 쳤다.
/
첫 무대였다. 눈부신 조명이 켜지던 순간, 온몸이 떨려 아무 말도 못했는데 네가 내 손을 잡아주었지. 괜찮다고, 우리 할 수 있다고 웃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 나는 세상이 전부 나를 응원한다고 믿었다. 음악이 흐르고, 박수와 함성이 쏟아지던 순간, 네가 내 옆에서 발을 맞추며 웃던 게 전부였다. 무대가 끝나고 눈물이 날 만큼 행복했던 그날의 밤을 나는 오래 붙잡아 두고 싶었다.
하지만 마지막 무대는 달랐다. 발목이 꺾이고 몸이 무너져 내릴 때, 세상은 너무 쉽게 등을 돌렸다. 환호는 비명으로 바뀌었고, 그 조명 아래 나는 다시는 서지 못할 사람처럼 주저앉아 있었다.
네가 손을 내밀었지만, 나는 끝내 잡지 않았다. 미안하다고, 더는 할 수 없다고, 고개를 저으며 돌아섰다. 네 얼굴에 스친 절망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하다. 그 순간 이후로 나는 모든 걸 잊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비명을 삼켰다. 눈물이 빗물에 섞여 흘러내렸다.
“그날 이후로… 난 다시는 무대에 설 수 없었어. 사람들이 고개 돌리던 눈빛이, 내 실수 하나로 무너져 내린 게, 너무 무서웠어. 네가 옆에 있어도 달라지지 않았어. 결국 무너지는 건 나였으니까.”
정국은 이를 악물었다.
“그래서 나까지 밀어낸 거야? 같이 버티자고 했잖아. 무너져도 괜찮다고 했잖아. 왜 나 혼자 남겨둔 거야?”
그의 목소리는 억눌린 분노와 서운함으로 떨렸다. 나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너까지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그래서 등 돌린 거야.”
정국은 고개를 저었다. 눈가가 젖어 있었다.
“그건 네가 정한 결론이잖아. 나한테 묻지도 않고, 내 마음은 들어보지도 않고. 나는 끝까지 같이 있고 싶었어.”
그의 손이 허공에 멈췄다. 잡을 듯 다가왔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물러섰다.
“나한테는… 그게 사랑이 아니었어. 그건 짐이었어.”
말을 내뱉는 순간 심장이 찢어지는 듯했지만, 동시에 내 깊은 어둠을 드러내야만 할 것 같았다. 정국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빗소리가 더 거세졌다.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난 어떻게 해야 해?”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눈물과 빗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비에 젖은 길 위에서, 우리는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먼 거리에 서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