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나도 연애하고 싶다.”
세하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처럼 내뱉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여름이 막 지나간 가을의 하늘은 파랗고 높고 맑았다. 우중충하기 그지없는 자신의 속과는 미치도록 대조적이게 말이다.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해주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데, 자신의 그 열기에 맞춰줄 만한 사람이 도통 보이지 않으니, 세하의 까만 눈동자가 짜증으로 점철되어 가고 있었다. 밤마다 맥주 한잔으로 애정에 대한 욕구와 욕망을 강제적으로 주저앉히고 오지도 않는 잠을 청한 게 지금 몇 달째인지. 이대로 있다간 지독한 외로움에 속 터져 죽을지도 몰라, 라는 생각을 하며 세하는 또 한 번 깊고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과 함께 부스스한 그녀의 부드러운 긴 생머리가 어지러이 흔들렸다.
“강세하! 또 한숨이니? 정말이지, 진짜 소개팅이라도 해줄까?”
“은재야...”
“아무나 만나고 싶지는 않다고 하니...대체 어쩌란 거야.”
“그치만, 나는...운명의 상대를 만나고 싶은 거라고. 그냥 사이좋은 친구나 스쳐 지나갈 썸남 이런 게 아니란 말야...”
“어휴, 이 쓸데없이 고집 센 로맨티스트 같으니...”
은재의 표정에 헛웃음이 퍼졌고, 그녀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친했던 세하는 어릴 때부터 늘 그랬다. 부모와 일찍 헤어져 버린 친구 강세하. 하지만 인생이 그녀를 힘들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세하는 가벼운 사람으로 자라지 않았다. 바보스러울 만큼 아름다운, 영화 속 주인공 같은, 그런 로맨틱하고도 운명적인 사랑을 하길 원하는 그런 조금은 특이하지만 순수하고 솔직한 존재였다. 은재는 세하의 어깨를 응원한다는 듯 두드려주며 말했다.
“그럼 여기서 이러지 말고 교회나 성당이라도 가보던가. 가서 기도해봐. 혹시 알아? 신이 불쌍해서라도 하늘에서 운명의 상대 하나 네 앞에 뚝 떨어트려 줄지?”
은재가 손을 흔들어주고는 가버리고 나자, 세하는 쩝, 소리가 나도록 입맛을 다셨다. 헛웃음이 나오는 말이었지만 이내 세하는 심각하게 고민에 빠졌다. 하긴, 운명의 상대라는 건 신이 정해주는 것 아니었던가 싶기도 하고. 종교 이런게 없긴 하지만, 어찌됐든 신에게 기도라도 하면 어쩐지 위로가 될지도 모른다는, 아니, 어쩌면 정말로 신이 자신에게 소중한 한 사람을 만나게 해줄지도 모른다는, 그런 희망이 생겨서 세하는 오늘 정말로 교회나 성당에 가서 기도라는 걸 해볼까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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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재와 헤어져 집으로 가던 길. 세하는 집 앞 작은 골목길 들어서는 입구 앞에 위치하고 있던 작은 성당의 현관을 열고 들어갔다. 어두컴컴했지만 작은 십자가가 걸려있는 벽에는 자그마한 조명이 켜져 있었다. 그 십자가 앞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간 세하. 조심스럽게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는 두 손을 모았다. 작은 목소리로,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수 있게, 그러나 아주 간절하게 기도라는 걸 해본다. 제발, 신이시여,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만나게 해주세요. 저를 사랑해주고, 제가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만나게 해주세요. 단 하루를 사랑하게 되더라도 평생 잊을 수 없을, 그런 강렬하고 멋진 사랑 해볼 수 있게 해주세요. 세하의 하얀 얼굴 가득히 희망에 부푼 미소가 엷게 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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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부터였다. 세하가 이상한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은.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세하는 항상 똑같은 꿈을 꾸기 시작했다. 매일 밤, 새하얀 날개를 가진, 그 날개와는 대조적으로 밤보다도 더 새까만 눈동자를 가진, 다부진 몸매의 한 남자가 세하의 꿈에 찾아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놀라서 벌떡 깼던 세하였지만 이게 매일 밤 이어지다 보니 익숙해진 건지, 세하는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그 남자를 기다리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그는 꿈속에서 세하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딱히 무언가를 어찌하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그 잔잔하고 다정스러운 목소리로 자신을 불러주었고, 그 새까만 눈동자로 자신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기만 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그 눈빛이 너무나 진하고 깊어서, 세하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낯설지만 이젠 낯설지 않은 존재에게 빠져들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넌...누구야...?”
어느 날, 세하는 그에게 용기를 내어 물었지만, 그는 옅게 웃음을 지어 보이기만 했다. 펄럭이는 양 날개에서는 따스한 공기가 퍼져 나왔고, 그의 까만 눈동자가 여느 때보다도 더 빛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