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 며칠간 정국에 대해서 그래도 알게 된 것들이 있었다. 그는 천사란 단어와 확실히 거리가 먼 존재였다. 천사라서 그런지 보통 인간들보다 훨씬 맷집 좋고 힘도 좋았다. 처음엔 그의 천사란 말이 여전히 믿기지 않았지만, 한 손으로 침대를 들어 올리는 걸 본 순간, 세하는 그 말을 믿기도 했다. 이 무식한 힘이 인간에게 가능할 리 없으니까! 뭐, 체력이 남다르다는 점에선 그는 확실히 유용한 데가 있었다. 평소보다 장을 많이 봐도 그가 다 날라주니 편하기도 했고 무거운 가구를 아무렇지 않게 들고 옮겨주니 그 덕분에 인테리어를 바꿀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유용한 점은 그게 다였다. 그는 확실히 머리보단 주먹이 앞서는 스타일인데다, 참을성은 제로에, 욱하는 성질머리가 장난 아니었다. 일단 화가 나면 욕설부터 비집고 나오기 일쑤였고, 삐지기라도 하면 하루종일 구시렁대고 있었다. 하지만 세하는 어쩐지 그런 정국이 싫지는 않았다. 자신을 이 땅에서 돌봐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인지, 자기의 주변을 마치 사냥개인 마냥 으르렁거리며 경계하는 그가 어쩐지 믿음직스러울 때도 있어서, 세하는 그새 그에게 너무 익숙해져 버린건가 싶을 지경이기도 했다. 하루도 조용히 지나갈 날이 없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하는 늘 고요하기만 하던 자신의 집이, 자신의 주변이, 그가 나타남으로 인해 떠들썩하고 소란스러워졌다는 사실이 어쩐지 즐겁기도 했다.
“세하.”
“응?”
“오늘은 어디 안 나가?”
“왜. 산책이라도 하고 싶어졌어?”
“집에만 있으니까 답답해서. 날개가 사라져서 하늘도 못 날고. 걸어 다니는 것도 갑갑터져 죽겠는데, 집에만 있자니 돌아버리겠다.”
정국의 볼멘 소리에 세하의 입술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었다. 이건 뭐 산책시켜달라고 우는소리 하는 강아지 한 마리도 아니고. 겉으로는 툴툴대고 있지만 실상 자기를 바라보고 서 있는 정국의 검은 눈동자는 기대심에 잔뜩 부풀어 있었다. 인간 세상에 대한 그의 호기심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래. 나가보자.”
“앗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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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국과 함께 걷는 작은 공원 내 산책길은 꽤 한산했다. 노을이 지는 하늘도 꽤 아름다웠다. 세하는 저녁 바람에 휘날려 눈을 가린 머리카락을 시원하게 쓸어 올리며 힐긋 옆을 돌아보며 정국의 옆 모습을 살폈다. 천사라고 하기엔 그에겐 검은색이 짙다. 머리카락도 짙은 검은빛, 눈동자도 흑요석처럼 검은빛, 그리고 유난히 그에게서는 짙은 아우라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가 천사라는 사실이 세하는 이젠 조금 믿어질 것 같았다. 그는 순수했다. 솔직했고, 거침이 없었다. 인간들처럼 머리를 굴리거나 얕은 수를 쓰거나, 사람을 속이려 하거나 사리사욕을 채우려 하는 그런 경우가 없었다. 아마도 인간이었다면, 많은 여자 사이에 끼여 인기를 누리며 살았을 것 같은 그런 스타일이랄까. 천사치곤 참 특이하지만, 그 어떤 천사보다도 강할 것 같은 느낌이 물씬 풍겨나는 녀석이었다. 그런 정국이 세하는 꽤 마음에 들었다. 이대로 같이 살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진 않아, 자기도 모르게 그런 생각까지 하고 말았던지라, 세하는 흠칫하고 놀랐다.
“우리, 정말 한달...만 같이 사는거야?”
“뭐, 우선 한달 만에 나는 사랑을 배워야 되고, 너는 날 사랑하면 되는 거니까. 그거면 되는거 아닌가?”
“...그 후엔?”
“그 후라니?”
“그래서 한달 후에 정말로 내가 널 사랑하게 되어버리게 되면? 네가 사랑을 배워버리고 나면? 그땐 어떻게 되는데?”
“그...그럼 뭐...”
세하의 질문에 정국은 금방 답을 해주질 못했다. 하지만 세하는 싱긋 웃어버렸다. 역시 거짓말 못하네. 천사가 맞긴 맞나봐. 하지만 뭐 어때. 단 한 달뿐이라도, 한 번쯤 꿈꿨던 사랑이라는 걸 실컷 해볼 수만 있다면 여한은 남지 않을지도.
“넌 어떤 천사였어? 궁금하다.”
“...뭐, 보면 알잖아.”
“...집에서 쫓겨나서 힘들었겠다.”
세하의 작은 중얼거림에 정국의 까만 눈이 힐긋 돌아본다. 집이라. 천국을 집이라고 생각해본 적 있었던가. 신이 내린 사명에 따라 존재하는 존재, 그것이 천사다. 사랑을 전하고, 사랑을 심고, 사랑을 지키는 고귀하고 성스러운 존재, 그것이 바로 천사다. 그런데, 신의 손에 의해 창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신의 사명을 지키는 것도, 신을 대신해 사랑을 지키는 것조차도 해내지 못했다. 그래서 쫓겨난 것이다. 쫓겨난 것 자체가 자존심 상하고 화나는 일이었다. 그냥 천사도 아니고, 천사장인 자신을 그렇게 내치다니, 신이란 놈이 드디어 돌아버렸나, 하고 발을 구르며 분노했었다. 힘들었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는데. 나, 그동안 사실 힘들었던 건가? 쫓겨난 것이 힘이 드는 일이었던가? 갑자기 가슴 언저리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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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국이 눈길이 세하를 다시금 훑었다. 신기한 인간이다. 소심하고 겁도 많고 엉뚱하다. 쓸데없는 정은 또 어지간히도 많다. 그런데 또 강단 있고 생존력 강한 모습도 보여준다. 하여간 참 특이해. 이 험난한 인간 세상을, 가족 한 명 없이 홀로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어쩌면 그런 기묘한 강함 덕분이려나. 정국의 눈길이 문득 세하가 신고 있던 허름해진 운동화 끝에 가 닿았다. 금방이라도 밑창이 떨어질 것 같은 운동화가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국의 미간이 확 찡그려졌다.
“어이, 따라와.”
“어, 어디 가는데에!!”
“시끄럽고 그냥 따라와 봐!”
정국의 커다란 손이 세하의 손을 거침없이 잡아채 왔다. 그리고는 어딘가로 날 듯이 걸어가기 시작했고, 세하는 정신없이 정국에게 손을 굳게 잡힌 채, 그의 무지막지한 속도를 따라 거의 뛰기 시작했다. 차오르는 숨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시원한 저녁 바람이 조금은 덥게 느껴졌던 것은, 대체 무엇 때문일까. 세하는 고개를 들어올려 정국을 바라보았다. 아, 어쩐지 알 것 같아. 네 손이 너무 뜨거워서 그런 거구나. 네 손이 내 손을 잡고있는 이 순간이 그냥 좋아서 그런 거구나. 세하는 정국의 손을 꼬옥 잡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