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핀도르의 비밀

[미리별] 한여름 밤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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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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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경적 소리와 사람들로 북적이는 시내에서 도망쳐 온 곳은 잔잔한 파도 소리가 선명하게 들리는 바닷가였다. 사람들의 발길이 떨어진 한밤중에 바다는 답답했던 가슴을 뚫어줬지만, 그리웠던 한편으로는 다시는 떠오르고 싶지 않았던 아픈 기억을 생생하게 되살려 놓았다. 염치없는 년, 넌 아플 자격도 없어. 네가 무슨 자격으로 잊어? 하나도 빠짐없이 생생하게 기억하면서 평생 지옥 속에서 고통받으면서 살아. 알았어? 어둡고 깊숙한 곳에서 숨어있었던 또 다른 내가 울부짖었다.
솔직하게는 그와의 추억을 이렇게라도 떠오르고 싶었을지도.




햇살이 따사로운 4년 전 어느 여름날, 집에서 뒹굴거리기에는 너무 아까운 마음이 들어, 내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태형을 조심스럽게 깨우기 시작했다. 태형아, 오빠, 자기야, 여보야. 잘 쓰지도 않은 호칭을 쓰면서까지 깨우기에 열중했지. 그래도 아무 미동도 없자 이마, 눈, 코, 입을 차례대로 입 맞추었다. 이제서야 겨우 실눈을 뜨고 웃는다.





"무슨 일이길래, 우리 연이가 아침부터 왜 끼를 부릴까?"

"우리 바다 보러 가자"

"갑자기 바다?"

"오늘 날씨가 딱 바닷가 갈 날씨야"





일 때문에 지치고 힘들어 쉬고 싶어하는 널 알아주지 못하고 눈치도 없이 바다로 가자고 졸랐다. 너는 힘든 기색 하나도 없이 활짝 웃으면서 그러자고 하였다. 철이 덜 들었던 나는 너랑 같이 바다를 가는 것이 좋기만 하였다. 바보처럼.

바닷가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를 반기는 시원한 바람과 모래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행복한 웃음소리가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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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아, 사진 찍어줄게"

"아냐, 오늘은 혼자 안 찍을래. 우리 같이 찍자"




함께한 지도 벌써 2년 6개월인 우리. 어딜 놀러 가든지 항상 나 먼저 찍어주고 다음에 같이 찍고는 했었다. 음식을 골라도 나한테 먼저 물어보았고, 밥을 먹어도 내가 한 숟갈을 뜨는 걸 보고 나서 먹었다. 그렇게 태형이는 언제든지 내가 먼저였다.

내 전부, 라는 사진첩의 우리가 함께했던 모든 추억들을 사진으로 남겼다. 뽑은 사진들을 사진관에서 받으러 간 날, 사진첩의 마지막 사진이었던 바닷가에서 찍은 그 사진을 보고 한참을 울었다. 사진 속 너와 나의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 너무 아팠다. 다 내 탓인 걸 알아서.

그날따라 바닷가에는 연인들이 눈에 띄었다. 행복해 보이는 연인들의 모습을 보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왠지 오늘따라 유치하게 놀고 싶은지, 멍을 때리면서 바다를 구경하는 태형의 볼에 가볍게 입 맞춘 뒤 나 잡아봐라를 시전했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당황한 눈치였지만, 얼굴 가득 미소를 띠고서는 나를 쫒아왔다. 이래 봬도 학생 시절 육상부를 했던 나는 달리기가 빨랐기에 순식간에 태형이와 멀리 떨어졌다. 하지만 운동선수 집안의 손주인 태형은 손쉽게 날 따라잡아 백허그로 안았다.





"너 달리기가 더 빨라진 것 같은데? 겨우 따라잡았네"

"치... 거짓말"

"거짓말 아니고 진짜야, 진짜"





백허그로 안은 채 믿어달라는 눈빛을 보이는 태형을 보고 안 웃을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누구 남친인지 안 이쁜 구석이 한 군데도 없어. 백허그를 풀고 태형이의 두 뺨을 가볍게 감싸 잡았다.




"알았어. 믿어줄게"




태형이가 없으면 나도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살았었다. 지금의 나는 속이 텅 빈 껍데기일 뿐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침에 쨍쨍했던 해는 어느샌가 구름 뒤에 가려져 사라졌고 어두컴컴한 검은 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하자 바닷가에 있었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빠져나갔다. 북적였던 바닷가는 어느새 썰렁해졌고 남은 건 태형이와 나 그리고 엄마랑 같이 온 아이뿐이었다. 쌀쌀해진 날씨에 돌아가려는 듯 아이의 엄마는 짐을 정리하고 있었고 아이는 바다 가까이서 놀고 있었다.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더니 잔잔했던 파도가 높이 치기 시작했다. 순식간이었다. 눈 깜빡할 사이에 바닷가 주변에서 놀던 아이를 파도가 덮쳐간 것이었다. 아이는 차가운 바닷속에서 겨우겨우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아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달려가려는 아이의 엄마를 붙잡은 태형이 아이용 튜브를 들고서는 바다에 들어가려 했다. 그런 태형을 내가 붙잡았다.




"ㅌ,태형아. 우리 사람 부르자, 응?"

"세연아. 사람 부르면 너무 늦어"

"그래도 이건 너무 위험해. 너,까지 위험해질 수 있어...!"

"연아. 나 꼭 돌아온다고 약속할게. 사랑해, 세연아"

"ㄴ,나도.. 사랑,해 태형아"





그렇게 난 태형이의 손을 놓았다. 그때 난 태형이의 손을 놓치면 안 됐었다. 끝까지 놓지 않고 이기적이어야만 했다. 비인지 눈물인지 분간이 안 되는 액체가 계속해서 뺨을 따라 흘러 떨어졌다. 태형이는 능숙한 수영 실력으로 요동치는 파도 속에서 아이를 찾아 튜브를 쓰였고 데리고 나오려는 순간 빠르게 쫒아오는 파도에 태형은 아이를 바닷가로 세게 밀었다. 바닷가에 가까이 마중하고 있었던 아이의 엄마는 아이를 품에 안아 울었다.

아이는 무사히 엄마의 품에 돌아갔지만, 그 뒤에서 나와야 할 태형의 모습이 보이지가 않았다.




"ㅌ,태형아... 태형아...!!!!! 태형,태형아....!!!!!"




난 정신이 나간 상태로 바다로 달려들었다. 그런 나를 붙잡은 건 다름이 아니라 아이의 엄마였다. 위험하니, 사람을 찾아서 불러오자고. 난 아무것도 할 수도 없이 바다를 향해 울부짖었다. 그 후로 난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떠보니, 새하얀 천장이 보이는 방안이었다. 일어나자마자 난 태형을 찾았다. 태형이가 보이지 않아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방문이 열리고 아이의 엄마가 들어와서 말했다. 너무 고맙고, 정말로 미안하다고. 태형이는 경찰들이 총동원해서 찾고 있다는 것이었다.

희망을 버리지 않고 난 빌고 또 빌었다. 제발 태형이를 살려달라고, 살아서 돌아오게 해달라고. 하지만 나의 간절한 기도와는 반대로 태형이의 모습은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다.

네가 나한테 사랑한다고 했던 말이, 내 손을 감싸 잡았던 네 손의 온기가, 날 따뜻하게 안았었던 너의 그 품이 아직도 이렇게 생생한데. 네가 더 이상 내 곁에 없다는 사실이 믿겨지지가 않았었다. 그 후 3년 동안은 살아있는지도 죽었는지도 모른 채로 살았다. 주변 사람들의 노력과 태형이를 생각하면서 다시 일상을 천천히 찾아갔다. 그렇게 바쁘게 살면서 나도 모르게 기억에서 태형이와의 마지막 기억인 바닷가를 조금씩 지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다시 바닷가가 생각난 건, 태형이와 같이 찍은 사진 때문이었다. 매일 그 사진을 붙들어 안고 숨죽여 울었던 내가 생각나 심장이 내려앉았다. 어떻게 이걸 잊고 있었을까, 그날 내가 바닷가에 가자고 하지만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태형이가 내 옆에서 환하게 웃어줬을 텐데.

자신을 자책하면서 한밤중에 바닷가로 온 것이었다. 그때 생각을 떠올리자, 겨우 붙들고 있었던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다.




"ㅇ,아흐.. 태형아... 태형아..."




흐느껴 울던 나의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돌아보니, 어떤 남자가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어두워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조금 더 가까워지자 잘 보이지 않았던 남자의 얼굴이 달빛에 비췄을 때, 난 숨이 멎는 줄 알았다.




"ㅌ,태형아..."

"........."

"태,형아...!!! ㄴ,너 맞지, 그런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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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연아, 내가 너무 늦게 왔지?"

"늦어서 미안해"





지금 이 순간이 한여름 밤의 달콤한 꿈이 아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