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퍼드

왜.
이민혁이 셰퍼드 같은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건 일상이었음.
어쩜 날 이렇게 싫어하는지. 눈만 마주쳐도 뭘보냐는 얼굴로 잘생긴 얼굴을 그렇게 꾸긴다.
알았어. 안 봐.
같이 살고 있지만, 사귀는 사이라지만 억지로 사귀는 것 같다는 생각이 자주 들긴 해.. 근데 사실인 걸.

풉 뭐하냐 너네?
근데 딴 애들하고 있으면 세상 착하게 변해. 매번 놀랍더라.
오랜만에 간 동창회는 이민혁에겐 천국이겠지. 고딩 때부터 유명했던 이민혁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여학생들에게도 인기가 많았으니까 이민혁은 지금 세상 편한 얼굴임.
내가 사귀자고 말하지만 않았어도 이민혁 짜증내는 얼굴을 보고 살진 않았을텐데. 참 후회스럽기도 하지만 이 짜증내는 얼굴이 이민혁이라면 보고 살아도 좋다고 생각하는 내 머리는 매번 헤어지잔 말을 삼키게 됨. ㅇㅇ 가능한 거였음. 왜냐면 이민혁은 내가 헤어지자고 하면 잃을만 한 건 없음. 오히려 더 좋지. 내가헤어지자고 하면 결국 내가 지는 싸움이나 마찬가지니까.
야 박주연. 넌 좋겠다. 이민혁하고 사귀고.
그렇게 좋아하더니 결국 성공한 거지 뭐.
그덕에 여자애들 다 너 싫어했잖아. 여자애들 그 때 기 쎘는데 어떻게 버텼냐.
여자애들 다 날 싫어했음. 꽤나 끔찍하게. 솔직히 내가 원하는 사람과 함께하면 눈초리는 가볍게 이겨낼 수 있을 줄 알았지만 내가 얻은 건 사랑이 아니었고 그저 관심과 욕들 뿐이었음. 그 때 내가 환상에서 깨어났음. 내가 꿈꿨던 건 다 개 꿈이란 거.
..ㅎㅎ 잘 버텼지..
이민혁은 그때나 지금이나 무뚝뚝했고 내가 어디 다쳐서 오면 걱정은 커녕 오늘은 또 왜 늦었냐며 화만 내기 일쑤였음. 그럴 때마다 난 비라도 맞고 온 강아지마냥 입을 꾹 닫았고 어차피 내가 설명해도 듣지 않을 이민혁이었으니까. 이민혁한테 난 먼저 걸어가면 쫓아가서 발을 맞춰야 하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근데 이민혁이 아깝긴 하지..
야 앞에 있는 애한테 그게 무슨 말이냐. 주연이 오랜만에 봤잖아.
이미 적응을 해둬서 크게 타격은 없었다.
괜찮아. 이미 많이 들어서 내성 생겼다.
그래도 괜히 맘은 상했는지 그래도 남친이라고 옆 대각선 테이블에 앉아있는 이민혁을 힐끔 쳐다봤는데

술도 안 마셨는데 이민혁이 조금 피곤해보였음. 물론 알쓰라 술을 안 마시긴 하지만 술 안 마셔도 원래 저런 텐션은 아니었음. 친구들 만나면 세상 해맑게 행동하는데 많이 지쳤는지 그냥 지금 가야겠다 싶었음.
이민혁. 나 먼저 갈게. 놀다가 들어와.

같이 가. 너 차 없잖아.
아 내가 말했던가. 나 면허가 없다.
주연아 너 차 없어..?
뚜벅이 인생만 27년차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어. 없어..ㅎㅎ
얼른 가자.
민혁아 다음에 또 보자~

어~ 연락할게.
이민혁은 그냥 행복하게 친구만나고 노는 게 더 좋아보였음. 당연한 소리지만. 답답한 나랑 같이 살기엔 저 자유로운 이민혁 성에 차겠냐고. 근데 이민혁이 헤어지자고 하기 전까진 나도 안 헤어질 거임. 되게 바보 같은 생각이지만 이민혁한테 들어야 내가 후회 안 할 것 같아서.
벨트 매.
어.
그렇게 차타고 집 가고 있었는데 이민혁이 갑자기 한소리 함. 얘 원래 나랑 있을 때 내가 쳐다보기 전까진 먼저 입 안 여는데.
너 아까 왜 아무소리 안 했냐.
뭐가?
걔네가 너 아깝다고 했잖아.
그게 들렸어? 꽤 작게 말했는데.
그래서 왜 아무소리 안 했냐고.
사실인데 뭐.
내가 저기서 반박할게 뭐 있나. 다 맞는 말인데. 근데 또 이민혁이 저런 반응이니까 괜히 상처 받은 척 하고 싶었는데 질색할 것 같아서 그냥 접었음.
화내고 싶을 땐 화 내고 살아. 안 답답하냐.
걱정은 아니고.. 나한테 짜증내는 것 같다? 근데 나 은근 화 내면 무서워. 내가 너한테 화를 안 내서 그런 거지. 너 울 수도 있는데.
하지만 이민혁이 누구냐. 내 말 씹기 장인이지.
그래 됐다. 됐어. 어차피 나한테 관심도 없는데 넌.
지금 내가 내 입으로 꺼낸 건가 의심함. 괜히 얘 이상하게 받아들일 것 같아서 한번 쳐다봄. 근데 별로 신경 안 쓰는 눈치길래. 그럼 그렇지 하고 나도 긴장 풀었음. 근데 훅 들어오더라.
누가그래. 내가 너한테 관심 없다고?순간 얘 뭐지 싶었음. 행동도 말투도 뭐 하나 관심 표현이라곤 찾아보지도 못했는데 당연히 관심 없는 것처럼 생각하지.
맞잖아. 관심 없는 거.
정말 어느 부분에서 관심이란 걸 느낄 수 있었나 싶었음. 맨날 화내고 화나있고 폰만 보는데.

알았어. 고칠게.
이런 반응일 줄은 몰랐음.
헤어지자는 말이 아니라?!
난 관심 없는 거 맞으니까 헤어지자고 할 줄 알았는데 예상을 깬 말이었다.
너 나 싫어하잖아.
내가 언제.
얘기를 들어보니 얘 나 술 취해있을 때 꿈으로 어렴풋이 기억나던 거 생각났음. 이민혁 때문에 힘들어서 먹지도 못하는 술 사가지고 집에서 혼자 마시다가 이민혁이 본 거임. 근데 나 꼴랑 맥주 1캔에 감. 근데 나 알쓴데 1캔이면 나름 많이 마신 거.. 물론 다 못 마시고 남은 4캔은 쓰레기가 됨. 암튼 이민혁이 나 보고 왜 술 마시냐고 뭐라뭐라 하고 내가 걔한테 너 행동거지 다 힘들다고 막 나도 뭐라고 했는데 얘가 막 미안하다고 토닥여줬었음. 아 물론 꿈에서.
근데 이게 진짜였던 거. 그래서 이민혁 조금씩 고쳐보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고딩 때부터 지금까지 쭉 그래왔으니 어디 변하는 게 쉽냐고. 여전히 힘들다더라. 그래도 날 싫어하진 않는다고 하는 거임.
참 빨리도 말한다. 애정표현도 뭐도 없고 난 그냥 나만 좋아하는 줄 알았지.
아냐. 나도 너 좋아해. 내가 네가 편하다고 막 대한 것 같아서 미안해. 근데 나 너 진짜 좋아해.
ㅋㅋㅋㅋ너 원래 성격이 셰퍼드다 이거지? 그럼 난 치와와할래. 둘이 지지고 박고 다 해보자. 나도 한 성깔한다. 다 갚아줄 거. 당해봐라.
집으로 올라가며 우린 이민혁도 박주연도 이해해주기로 정리함. 대신 나도 같이 이민혁 같이 잠깐 살아보기로 함.
그리고 며칠 뒤.

나 오늘 늦어. 약속 있으니까 먼저 자라.
이 새벽에 나가려고 하는 거임. 눈 비비면서. 무슨 일인가 싶어서 걍 나도 애들 데리고 약속 잡음. 아 물론 여잔데 언니들.
나도 약속 잡혀서 나가야 됨.
난 드라마보면서 안 자고 있어서 정신 멀쩡했는데 이민혁은 나랑 같이 드라마보다가 졸아서 지금 멀쩡하지가 않음.
이 새벽에? 데려다줘?
아니 탈 차 있음. 넌 지금 정신이나 챙기고나 말해. 먼저 간다. 나 너보다 늦게 올 수도 있어. 여자끼리 밤새 놀테니까 전화하지 말고.
셰퍼드 상대하기 좋은 사람이 바로 나임. 달라진 나를 이민혁은 빠르게 적응해가면서 나한테도 따뜻하게 대해줌. 뭐 어쩌면 그 전부터 무뚝뚝하게 대하면서 할 거는 또 다 해줬을지도.
암튼 이민혁 깼으니까 하는 말인데.
어.
도착하면 연락해. 알겠지?!

알았어~ 너도 연락하고!
이젠 셰퍼드도 이민혁도 말티즈 됨. 나가기 전에 현관 앞에서 설레는 말로 서로 죽이고 나감.
설레는 말이 뭐냐고?

뭐겠어.
사랑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