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수한
라이벌 혹은 사랑.
말랑공 씀.
*본 글의 소재는 영광스럽게도 LOYA-S 님께서 주신 소재입니다.
*본 글은 폭력적인 장면, 욕설과 가정폭력을 담은 장면을 포함하고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열여덟의 최아윤, 그리고 열여덟의 박지민. 둘은 같은 명문 고등학교에 다니는 친구이자 피아니스트계의 라이벌같은 관계였다. 서로 학교에서 마주치기만 하면 아니꼬운 눈빛을 주고받곤 했으며 주변인들의 시선 탓에 친하게 지내는 척 가식적인 웃음을 자아냈었다. 둘은 어린 나이에 꽤나 유명해져버려 벌써부터 표정 관리를 하고 다녀야만 했다. 그러나 아윤은 그다지 싫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지민이 점점 좋아지기 시작했다. 물론 지민을 향해 사랑이라는 감정이 뛰었을 때 부정했었다. 내가 박지민을 좋아할리가 없다고. 하지만 아윤은 지민과 가까이 지내며 지민이 제법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느꼈고, 라이벌인 제게 가식적이더라도 다정하게 구는 모습에 설렜다.
아윤이 점점 지민에게 빠져들기 시작했을 때 지민은 아윤이 그저 싫고 밉기만 했다. 돈이 많지 않은 집안이라 레슨은 물론 연습도 많이 하지 못 했던 지민은 힘들다며, 레슨 받기 싫다며 징징대는, 돈이 많은 집안인 아윤이 싫었다. 지민은 축복받은 존재인 줄도 모르고 계속해서 징징대는 아윤이 보기 싫었다. 아윤의 진짜 가정사도 모르고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아윤이 지민에게 단 한 번도 가정사를 꺼낸 적도 없었으며 아윤은 자신의 가정사를 부끄럽고 누군가한테 말하기에 두려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민아, 오늘 레슨 같이 할래? 너도 같이 와도 된대.”
아윤이는 그저 순수하게 지민을 위해 했던 말이었지만 지민에게 그 말은 꽤나 잔혹하고 자신을 초라하게 만드는 것처럼 들려왔다. 그러나 지민은 남들 앞이니까, 그래도 유명한 선생님께 레슨을 받을 기회니까 다정하게 웃으며 흔쾌히 고맙다고 대답했다. 아윤이는 그 대답이 정말로 고마워서 나온 대답이라고 착각하고 말았지만 말이다.
“어머, 네가 지민이니? 아윤이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
“처음 뵙습니다. 오늘, 잘 부탁드려요.”
“아윤이가 오늘만 말고 계속 너랑 같이 레슨 받고 싶다던데? 아 참, 돈은 걱정하지 마. 아윤이가 네 몫까지 내기로 했어.”
아윤이의 순수한 배려. 지민에게는 그 배려가 너무나도 잔인하게 와닿았다. 하지만 이곳에서 소리쳐 봤자, 아윤에게 나무라 봤자 손해 보는 건 자신인 걸 알기에 구태여 입술을 꽉 깨물며 아윤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아윤은 이번에도 그 고맙다던 말이 정말로 고마워서 하는 말인 줄 착각했다. 그래서일까, 자신의 사랑에 확신이 점점 더 서기 시작했고, 남이 눈치챌 정도로, 그러나 우습게도 당사자인 지민은 눈치채지 못 할 정도로 커져버렸다. 그 무렵 그런 아윤을 눈치챈 그녀의 어머니께서 지켜보고 있었다.
“…오늘 고마웠어. 내일 학교에서 봐.”
“응. 내일 봐, 지민아!”
잔뜩 상기된 아윤의 뺨. 그것은 지민에 대한 사랑이 너무 커져버려 그가 가만히 있기만 해도 설레서 그랬으리라.
아윤이와 그녀의 어머니만이 남은 집. 입안에 단맛이 돌 정도로 달달하게 느껴졌던 아까의 분위기와 달리 갑자기 아윤의 온몸에 냉기가 돌았다. 아윤은 이 분위기가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이 분위기. 두려운 이 분위기. 아윤은 올라가 있는 어머니의 손을 발견하고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살갗과 살갗이 닿는 큰 소리와 함께 아윤의 한 쪽 뺨은 붉게 물들었고 익숙한 고통에도 아프고 서러워 눈물이 살짝 맺혔다.
“설마 너 쟤 좋아하니? 엄마가 사랑은 안 된다고 말했어, 안 했어. 어? 누구 좋아하거나 하면 커리어에 기스 난다고 했잖아. 왜 엄마 말을 안 듣지?”
“…”
“대답 안 해? 너 요즘 덜 맞아서 그런 거야?”
“죄송합니다…”
“빨리 마음 정리나 해. 너 때문에, 니 년 때문에 돈 날렸잖아. 무슨 거지같은 놈을 데려와선. 좋아하려면 급에 맞는 애를 좋아하라고.”
거지같은 놈. 급에 맞는 애를 좋아해라. 아윤은 자신에 대한 욕을 하는 건 참을 수 있었어도, 속으로 곪아가며 참을 수 있었어도 지민을 욕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게다가 급에 맞이 않다니, 거지같은 놈이라니. 아윤은 처음으로 그토록이나 두려워했던 어머니께 화를 냈다. 그리고 그 화는 아윤에게 더 큰 화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거지같은 놈이요? 급에 맞지 않다구요? 왜 그렇게 말하는 거예요, 엄마. 완전 저급해요. 거지같은 건 엄마의 그런 마음이에요.”
어머니의 긴 침묵. 그 순간 아윤은 뺨을 때리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을 거라고 짐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