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집

하얀 건반 위 새빨간 피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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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


하얀 건반 위 새빨간 피.


말랑공 씀.




*본 글의 소재는 영광스럽게도 LOYA-S 님께서 주신 소재입니다.
*본 글은 자결을 담은 장면을 포함하고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열여덟의 최아윤. 그녀는 어린 나이에 세상에게 버림을 받았고 그런 세상을 버렸다. 열여덟의 그녀가 버텨내기에는 너무나도 가혹한 세상이었다. 세상이 그녀를 조금만 더 보듬어 주었더라면 그녀의 엔딩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암흑한 여명이 밝아온다. 지민은 뒤늦게 아윤의 소식을 접하고서 그녀의 장례식장에 갔다왔었다. 그녀의 장례식장을 다녀오고 나서 집에 와 펑펑 울었던 기억이 그의 머릿속에 남아있다. 그는 새벽까지도 울다가 겨우 잠에 들었다. 아윤이가 죽었다는 슬픔에 울었던 것도 있었지만 왜인지 죄책감이 들어 울었던 것도 있었다. 그동안 아윤을 오해하고 싫어했던 것, 하지만 아윤은 그 사실을 모르고서 언제나 다정하게 다가와 준 것. 지민은 그 모든 게 미안했다. 죄스러웠다. 자기 자신이 싫었다.


  지민은 새벽에 너무나도 많이 울어 퉁퉁 부은 눈을 겨우 뜨고서 학교로 향했다. 학교에선 많은 아이들의 흐느낌이 들려왔다. 세상은 아윤을 버렸어도 그들의 친구들은 그녀를 버린 적이 없었다. 지민은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그녀의 사물함으로 직행했다. 정리해 주려고 간 것도 있었고, 그녀가 너무 그리워, 그녀가 남긴 무언가로라도 그녀를 기억하기 위해 갔던 것도 있었다. 지민은 아윤의 사물함을 조심스레 열었다. 그러자 아윤이가 가장 좋아하던 장미 향이 물씬 풍겨왔다. 아윤의 품에서도 났던 장미 향. 지민은 아윤이의 생각에 눈물이 나오려고 했지만 애들도 많은 이런 곳에서 울긴 싫어 꾹 참았다.


  “이건……?”


  지민의 눈에 바로 띈 것은 어느 악보와 가사지였다. 제목은 텅 비어있었다. 지민은 제목이 텅 비어있는 것에 의문이 들었지만 가사지를 천천히 읽어갔다. 그 가사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며 구원해 줘서 고맙다는 내용이었다. 지민은 가사를 전부 다 본 뒤에 텅 비어있는, 제목이 있어야 할 자리를 다시 봤다. 그러자 지우개로 지워서 자국만 남은 듯한 어느 글자가 희미하게 보였다. 지민은 희미하게나마 보이는 제목을 읊었다. 지민에게. 그 순간 아까까지만 해도 어떻게 해서든 참았던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아윤은 지민을 사랑했다. 아윤은 지민을 그리워했다. 아윤은 지민을 자신의 구원자라고 생각했다. 지민은 그런 아윤의 마음을 미처 몰라 주고 그저 아윤을 싫어하기에 바빴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 할 정도로 울면서도 지민은 그녀의 다이어리를 발견했다. 어쩌다 우연히 펼친 페이지에는 그녀가 어떠한 가정폭력을 당했는지 자세하게 써져 있었다. 그날을 잊고 싶지만 잊지 않기 위해. 나중에 꼭 신고하기 위해. 그때까지만 해도 아윤은 살고 싶었다. 세상이 아직 저를 버리지 않은 줄 착각했다. 그러나 아윤은 세상이 저를 버렸다는 것을 안 후부터 절망감에 빠져 그 어떠한 일기도 쓰지 않았다. 어차피 세상은 나를 버렸는데, 꾸준히 기록해 봤자 의미가 있을까. 아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 후로부터 몇 달이 지났다. 지민의 감정은 무뎌지는 듯 곪아갔다. 지민은 아윤을 위해 다이어리를 들고서 그녀의 어머니를 고소했다. 당연히 결말은 씁쓸했다. 다이어리 가지고는 소용이 없다면서, 시체는 이미 화장을 해 부검할 수도 없다면서. 지민의 예상대로였다. 세상은 역시나 그들을 버렸다. 지민은 아윤이가 남긴 가사지에 자신이 아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더하며 한 곡을 완성했다. 아윤이와 지민의 합작이었다. 지민은 아윤을 그리워하며 그 곡을 연주했다. 사람들은 그 곡을 듣고서 아윤을 그리워했다. 그리고 지민을 동정했다. 지민은 몇 번이고 아윤이와 자신이 만든 곡을 연주했다. 그러나 그 수십 번의 연주 중 아윤에게 닿은 연주는 없었다. 당연했다. 아윤은 세상에게 버림 받았고 세상을 버렸으니깐. 그 순간 지민은 연주를 멈췄다. 그러곤 생각했다. 아윤을 공명하겠노라고.


하얀 건반 위 새빨간 피_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