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운데
절벽 끝에서 외치는 절망의 비명소리.
말랑공 씀.
*본 글의 소재는 영광스럽게도 LOYA-S 님께서 주신 소재입니다.
*본 글은 폭력적인 장면, 자결을 담은 장면을 포함하고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극심한 고통과 함께 아윤은 눈을 떴다. 가장 먼저 아윤의 시야로 들어온 건 다름 아닌 병원 천장이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아윤을 걱정스런 눈빛으로 쳐다봤으며 입만 뻥긋뻥긋 대셨다. 아윤은 저게 무슨 소리일까 의사 선생님의 입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그제서야 아윤은 제 자신이 그 어떠한 소리도 못 듣고 있었다는 걸 자각했다. 주변의 소음도, 병원에서 나는 특유의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님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다못해 바람이 스치듯 지나가는 소리도. 아윤은 듣지 못 했다.
아윤이의 기억이 끊긴 건 어머니께 뺨을 맞고, 처음으로 대들고, 그러고 나서 어머니께 머리채를 붙잡히고 복부와 얼굴을 구타 당했을 때였다. 엄청난 고통 탓이었는지 아니면 충격 탓이었는지 아윤은 그 뒤로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아윤은 의사 선생님 옆에서 눈물을 흘리며 걱정스러운 척하는 어머니를 보고서 여기서 내가 빠져나가기는 글렀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자유도 빼앗겨버리고 청춘을 빼앗겨버리고 이제는 청각까지 빼앗겨버리고 말았다. 아윤은 아무런 가망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어느 정도의 희망은 남아있었다. 전부 지민 덕분이었다. 그저 지민에 대한 사랑, 그 덕분에 아윤은 청각을 잃은 것에 대해 절망하기도 했지만 약간의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병원에 입원하는 동안 고등학교 친구들이 아윤에게 찾아오곤 했다. 아윤은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청각을 잃게 된 피아니스트, 라는 수식어를 갖게 되었다. 그녀도 모르는 새에 말이다.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것도 아니었고, 자신이 사고를 당했다는 걸 기사화되지 않기를 원했지만… 이미 유명해져버린 몸. 기자들이 그런 기사를 마다하지 않을리가 없었다. 자극적인 기사. 대중들의 관심을 받을 만한 기사. 아윤은 기사 덕분에도 괴로웠다. 스트레스는 물론 아침마다 생목이 올라오곤 했다. 그렇게 괴로운 상황 속에서도 아윤은 누군가에게 줄 곡을 만들고 있었다. 그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아윤이 - -을 생각하기 시작했던 때가.
“…너 괜찮아?”
지민이 아윤을 찾아왔다. 아윤은 그가 찾아온 것만으로도 기뻤다. 지민은 여전히 그녀를 싫어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사람이 크게 다쳤다는데 아무리 싫어했어도,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니 걱정이 되는 게 당연했다. 그래도 친구였으니깐. 지민은 원래부터 수어를 할 줄 알았던 아윤을 위해 수어를 배웠다. 그러나 어떻게 수어를 할 줄 알았냐는 아윤의 질문에는 어렸을 때부터 관심이 많았어서, 어렸을 때부터 배웠어서 알고 있었다고 대답했다. 아윤을 생각한 배려였다.
“…지민아, 내일 또 와 줄 거야?”
“물론이지.”
아윤은 물론이라는 지민의 대답에 실실 웃었다. 병원에 입원하고 나서 처음으로 보인 사랑스러운 웃음이었다. 지민은 그 순간 가슴이 간질거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곤 생각했다. 어쩌면 자기가 아윤에 대해 오해한 걸지도 모른다면서. 그렇게 지민을 향한 아윤의 마음이 지민에게 조금씩 닿을 무렵 아윤은 이 세상을 미련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날 저녁이었다. 원래 자고 있어야 할 시간에 일어나 움직일 때면 주위를 살펴보거나 눈치를 많이 살피는데 아윤은 그러지 않았다. 걸리거나 말거나 상관없었다. 아윤은 그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그녀는 아무도 없는 화장실로 향하고 있었다. 방금 청소를 해 제법 향기로운 화장실에 도착한 아윤은 한 칸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그러곤 뒷주머니에 챙겨온 과일을 깎았던 칼을 꺼내 들었다. 아윤은 그 칼을 한참동안 응시했다.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약간의 긴장감. 그리고 두려움. 아윤은 눈을 뜬 채로 그 칼을 제 손목에 가져다 댔다. 그 후 아윤은 어떻게 됐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미친 듯이 칼을 그었던 것 같기도, 겁을 먹어 소심하게 그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바닥은 새빨간 피로 흥건했고 그녀의 옷 또한 새빨갛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 순간에도 아윤의 숨은 점점 멎어가고 있었다. 아윤은 잃어가던 정신 속에서 하얀 바닥이 새빨간 피로 물들어 가는 것을 보고 생각했다. 제 손이 닿았던 하얀 건반은 이미 예전부터 새빨간 피로 물들었으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