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위에
덧난 상처 위에 연고와 반창고를.
말랑공 씀.
*본 글의 소재는 영광스럽게도 LOYA-S 님께서 주신 소재입니다.
“허억… 헉……”
윤기와 시연은 서로의 손을 꼭 붙잡고 그 남성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남성이 더 이상 그들을 찾지 못 할 때까지, 지쳐서 더 이상 움직이지 못 할 때까지 달렸다. 먼저 지쳐서 잠시 쉬자고 한 건 시연이었다. 그녀는 항상 외출 금지 탓에 집밖을 통 나가지 못 했고 운동은 물론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못 했기에 윤기보다 체력이 훨씬 더 떨어졌다. 그녀는 숨이 넘어갈 듯 거친 숨을 몰아쉬며 눈앞에 보이는 공원에서 쉬자고 말했다. 윤기는 너무나도 힘들어 하는 시연을 보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늦은 시간인데도 사람들은 연인끼리 산책하러, 또는 반려동물과 산책하러 공원을 거닐었다. 꽤 듬성듬성 있는 사람들을 피해 윤기와 시연은 호수 앞 벤치에 앉았다. 그 둘은 많이 뛴 탓에 온몸에 열기가 올라 땀이 주륵 흐르고 있었다. 윤기는 대충 제 손으로 땀을 닦아낸 후 시연에겐 제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혹시 몰라서 항상 갖고 다니는데, 가지고 다니길 잘 했네요, 라고 덧붙이며. 시연은 괜찮다고, 네 손수건에 내 땀이 묻을 거라고 말하며 거절했다.
“그냥 손수건 써요, 누나. 다음에 만날 때 돌려 주세요.”
다음에 만날 때 돌려달라. 윤기는 자연스레 다음을 기약하며 시연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시연은 윤기의 손수건을 받고는 땅에 오랫동안 시선을 머물렀다. 손수건도 쓰지 않은 채. 아마도 윤기의 말을 되뇌이는 듯 싶었다. 다음에 만날 때 돌려달라. 그 말의 뜻은 다음에 또 만나자는 말이었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시연은 손수건을 꽉 쥐고 있을 뿐 쓰질 못 했다. 자신이 가장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가정사를 들키게 되어버렸는데, 어쩌면 윤기도 자신 때문에 위험해질지도 모르는데, 다음을 기약해도 되는 걸까, 이런 생각들이 시연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 - -
밤바람이 차갑게 불어왔다. 아직 식지 않은 땀 탓에 온몸에 냉기가 돌았다. 시연은 아까 집에서 밖으로 끌려나오느라 반팔만을 입고 있어 와이셔츠를 입은 윤기보다 훨씬 추위가 더 많이 느껴졌다. 그러나 시연은 겨울에도 반팔 차림으로 집밖으로 쫓겨나는, 벌이라고 치부된 폭력을 많이 받았었기에 추위에 익숙했다. 그럼에도 시연이 미세하게 떨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연에게 익숙했던 건 그 상황이었을까, 아니면 시연을 괴롭게 했던 추위의 고통이었을까.
윤기는 미세하게 떨고 있는 시연을 발견하자마자 제 가디건을 벗어 시연에게 걸쳐 주었다.
“아, 괜찮아. 너 추울 텐데, 너 입어. 윤기야.”
“전 와이셔츠라서 괜찮아요. 그치만 누나는 반팔이잖아요.”
“정말 괜찮은데……”
“낮에는 선선하지만 밤바람은 아직 차요, 누나. 그러니까 이거라도 걸치세요.”
“응… 고마워……”
시연의 눈은 여전히 땅을 향하고 있었다. 아무리 윤기가 그녀에게 시선을 맞추려고 해도 그녀는 맞춰 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자신의 가정사를 들킨 게 부끄럽고,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어색하고, 왠지 무서웠던 게 그 이유였다. 시연이 자꾸 땅만 바라보고 있자 윤기는 달달한 목소리로 부드럽게 말했다.
“누나, 저 봐 주세요.”
그제서야 시연은 윤기에게 시선을 서서히 맞추기 시작했다. 둘의 시선이 비로소 맞닿았을 때 시연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전에 나 좋아한다고 했었잖아. 아직도 내가 좋아?”
“물론이죠. 제 마음이 왜 변하겠어요.”
“그 모습을 보고도 아직도 내가 좋다고?”
“그 모습이 어떤 모습인데요. 전 그냥 누나 자체가 좋아요.”
시연은 윤기의 말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아주 어렸을 때를 제외하고 처음으로 자연스레 지었던 미소였다. 그것도 누군가의 앞에서 말이다. 윤기는 시연의 미소를 보자마자 저까지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저 누나 웃는 거 처음 봐요. 윤기가 신나서 말하자 시연은 그래? 라고 무심하게 대답한 뒤 윤기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시연의 급작스러운 스킨십에 윤기는 놀랐지만, 그 기쁨도 감출 수 없었다.
“누나, 저 이거 누나가 제 고백 받아 준 거라고 착각해도 돼요?”
“아니. 착각하지 마. 그렇다고 확실하게 생각해.”
“와, 진짜…… 사랑해요.”
“……나도.”
둘의 시간은 달달하게 흘러갔다. 방금까지만 해도 고통스러웠던 시연의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던 시연의 시간이 부드럽게, 그것도 달달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달달한 시간을 만끽하는 것도 잠시, 윤기는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이 번뜩 떠올랐다.
“참, 누나 아까 그 일은……”
“…”
“저, 누나. 누나만 괜찮다면 제 집에서 지낼래요? 제 집이 방도 많고 꽤 넓어서……”
“뭐…? 그래도 돼……?”
“네, 물론이죠. 저희는 이제 연인 사이잖아요.”
“…응, 그렇네.”
시연은 부끄러운지 고개를 떨구며 볼을 붉히고는 대답했다. 윤기는 그런 시연의 모습이 귀엽고 사랑스러워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누나, 잠깐 저 좀 봐 주세요.”
윤기의 한마디에 시연은 부끄러워 떨구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윤기가 시연의 턱을 잡더니 제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키스해도 돼요?”
“응.”
시연은 눈을 부드럽게 감았다. 윤기는 그런 시연의 입술을 제 입술로 포갰다. 그러자 시연의 입안으로 단맛이 돌았다. 입맞춤이란 건 원래 이렇게 달콤한 것일까. 시연은 그 순간 저의 메마른 입술에 덧난 상처가 아물어가는 걸 느꼈다.
누나, 저 좀 봐 주세요_마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