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브 템퍼링 사랑의 조절
"여주야!!"
"석진오빠~~~"
드디어 한국에 돌아오던 날, 출국장에서 날 기다리던 석진오빠에게 뛰어가 안겼다.
같은 과 선후배 CC였던 우리는 내가 떠나기 전, 모든 수업부터 점심 저녁 시간 까지 늘 붙어지냈었다. 하지만 공부는 할 수록 내 길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고, 달콤한 초콜릿을 좋아하던 나는 쇼콜라티에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석진오빠는 그런 나를 열열히 응원해주었고, 오빠의 응원 속에서 나는 학교를 그만두고 쇼콜라티에 과정을 밟았다. 그리고 프랑스 쇼콜라티에 훈련과정에도 합격하여 연수를 가게 되었다.
해외 연수를 떠난지 1년 반, 원거리 연애는 너무 힘들었다. 나는 석진오빠가 보고 싶을 때마다 더욱더 열심히 쇼콜라티에로서의 수련에 매진했고, 덕분에 2년 동안의 연수를 1년 반 만에 마칠 수 있었다. 더불어, 귀국 후 취업할 곳도 바로 결정이 되었다.
"어서와~ 고생했다."
공항에서 만난 오빠는 여전히 너무 다정했다. 폭 안겨버린 나의 어께를 토닥여주는 오빠가 너무 반갑고 좋았다.
. . .
초콜릿을 배울 때 가장 먼저 하는 것은 템퍼링(tempering)이다. 일정한 온도로 올렸다가 식혔다가를 반복하여 초콜릿에 섞여있는 여러 재료들이 잘 어우러지게 하는 작업이었다.
템퍼링은 가장 기본적인 일이면서도 예민한 과정이다. 온도를 너무 올려버리면 초콜릿이 타버리기도 하고 제대로 올리지 않으면 굳히고 난 뒤에 하얀 기름띠가 생기기도 했다.
나는 템퍼링을 할 때, 열심히 젖고 있는 초콜릿이 따끈해졌다가 식혔다가를 반복하며 점점 윤기가 도는 모습을 보고 있다보면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이 과정이 우리의 사랑 같았다.
우리의 사랑도 적당한 범위 안에서 해외연수같은 적당한 위기를 겪어가며 서로 더 잘 녹고 섞여 서로에 대한 믿음이 단단해지는 과정을 겪고 있는 것이길 믿고 있었다.
. . .
11월 빼빼로 데이를 시작으로 한참 바쁜 일정이 크리스마스까지 계속되고, 피곤에 지쳤던 나는 석진오빠가 너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억지로 만날 날짜를 잡았는데, 그만 야근이 잡혀 오빠가 한 시간 정도 기다리게 되었다.
최대한 일찍 나온다고 나온건데... ㅜㅠ
석진 오빠를 만나기로 한 곳은 내 직장 근처의 한 고깃집이었다.
"늦어서 미안해~~~~
할꺼 최대한 마치고 오려고 했는데,
갑자기 오더가 늘어서.. ㅜㅠ"
"괜찮아.. 시간이 여유있는 내가 기다려야지 뭐~"
석진오빠는 얕은 한숨을 쉬더니 점원을 불러 날 기다리는 동안 하얗게 변한 숯을 갈아달라고 이야기했다. 그러고는 곧 고기를 올려 언제나처럼 맛있게 구어주기 시작했다.
"진짜, 괜찮은 거 맞아..?"
"그럼... 어서 앉아..."
빨리 나오느라 서서 한참을 일했던 나는 오빠가 구어주는 고기를 받아먹으며 고픈 배를 채웠다. 예전 같으면 술 한 잔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을 텐데, 오늘은 그냥 너무 피곤했고, 오빠가 눈 앞에 있다는 것이 너무 좋았다. 그냥 그게 좋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한참 밥을 먹던 나에게 석진오빠가 예끼치 못한 말을 던졌다.
"너도 내가 한심하지...? 빨리 말해봐.."
뭐..? 내가 뭘 잘못들었나...? 하지만 농담이라기엔 석진오빠는 얼굴이 굳어있었다.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한 걸까...?
치지직....
눈앞의 고기가 타들어갔지만 당황한 나도, 뭔가 단단히 꼬인 듯한 석진오빠도 아무도 고기를 뒤집지 않았다.
"그게 무슨 소린데...?"
내 말에 석진오빠는 나를 지긋이 보더니 갑자기 소주 한 병을 시켰다. 막 냉장고에서 나온 시원한 소주를 잔에 따라 훌쩍 들이킨 오빠가 말을 이어갔다.
"넌 항상 괜찮다 하지만 난 괜찮지 않아.
너가 유학마치고 올 동안 여태 시험 통과 못한 내가,
너는 한심하지 않아?"
이번에 석진오빠는 외무고시 준비를 포기했다. 내가 해외연수 마치고 올 무렵이면 시험을 통과해 있을 거라고 호언장담하던 석진오빠는 여전히 제자리였고, 왠지 그런 오빠가 나는 너무 힘들어보여서, 그 일에 대한 이야기를 피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나의 태도가 도리어 무관심으로 비춰졌던 걸까...?
"다들 날개 달고 날아가는데, 나만 여전히 제자리야"
석진오빠는 마지막으로 같이 공부하던 스터디에서도 자신을 제외하고 합격하면서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오빠 그런 말 하지마... 그 말.. 진심 아닌 거 알아.
오빠 여태 잘해왔잖아..
난 오빠가 어떤 길을 가던 좋아. 오빠를 믿어"
내 말에 석진오빠는 도리어 더 슬픈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뭐? 잘해...? 날 기만하지마...
내 합격을 가장 바라던 건 너잖아.
나 합격하면 어서 날짜잡자고,
결혼식 올리자고 기다리고 있었으면서...."
"아니야...나 그렇게 급한 거..."
갑작스런 폭탄 발언에 나는 즉시 부인하긴 했지만... 오빠 말이 사실이긴 했다. 그렇지만... 그걸 어떻게 말로 해...
"너 볼 때마다 나는 질투가 나...
그리고 그렇고 나면 내가 한없이 한심해져....
참 우숩지...?"
이 말을 듣자 나는 나의 진심따위 저 멀리 사라져버렸다. 이 상황을 어떻게 벗어나야 할 지 머릿속이 복잡해지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탁~!!
내가 아무 말 못하고 가만히 있자, 거칠게 수저를 내려놓은 석진오빠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응...?? 저... 오빠.. "
"오늘 기분도 그렇고 여기서 찟어지자... 나도 내일은 본가에 가야하고.. 너도 새벽에 출근해야하잖아. "
"아니, 우리 며칠 만에 본 건데..."
석진오빠는 일어나더니 말 없이 계산을 하고는 나가버렸다. 잠시 내가 멍청이처럼 우물쭈물 하는 사이, 어느새 숯이 되버린 고기가 차갑게 식어 자리에 남았다.
우리의 탬퍼링은 실패한 걸까? 난 숯이 되어버린 고기가 마치 부글부글 끓어올랐다가 차게 식은 초콜릿처럼 느껴졌다.
. . .
석진오빠는 이후로 잘 연락이 되지 않았고, 나는 이후 밸런타인까지 계속 일에 매달리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냥 왠지 오빠에게 연락해도 될지 확신이 없었다. 시간이 필요한 걸까 싶어서 일에 파묻혀 지냈다.
하....
그리고 석진오빠의 이별 문자가 온 것은 밸런타인날, 혹시나 하고 연락 했을 때였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내가 연수를 떠난 후로, 우리는 서로 힘들지 않기 위해 어려운 이야기를 줄곧 회피해왔다. 나는 이 과정이 적당한 온도 안에서 이뤄지는 템퍼링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도망치며 차게 식도록 내버려 두고 있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내가 연수를 떠나기 전만 해도 석진오빠가 외무고시에 합격하면 함께 여러 나라를 다니며 초콜릿을 만들고 싶다고 했었는데... 오빠의 전폭적인 사랑을 받으며 나는 내 꿈에 매진했으면서 오빠의 꿈에는 관심을 갖질 않았다.
석진오빠의 취직 여부 상관없이 그냥 숟가락 두 벌 놓고 시작하자고, 이야기 해 볼 수도 있었을 텐데.. 오빠에게 힘내라고 날 응원해주고 지지해준 것 처럼 오빠를 격려해줬어야 했는데...
어쩌면 오빠도 그런 나를 기다렸던 게 아닐까...?
내가 나의 일이 바쁘고 나의 새로운 삶에 빠져서
자신감을 잃어가는 작아져가는 석진오빠를 잘 봐주질 못했다.
이별의 기운은 나에게서 시작되고 있었다.
나의 러브 템퍼링은 완벽한 실패였다.
내가 돌아온 이후 우리는 단 한번도 따끈하게 데워지지 못했던 것을 나는 이제서야 깨닭았다.
끝.
*모든 이야기는 작가 머릿속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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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머릿속에 지진정 (20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