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날 누구든 여주의 구원이 될 수 있었다. 성냥불은 눈발에 희끄무레하게 번져가고, 조그만 입술은 희게 얼어 말 한 마디 토해내기가 녹록지 않았다. 가족은 없고 그렇다고 빈자리를 대신할 사람도 없다. 보스턴의 시린 밤거리에 덩그러니 놓여 있노라면 여주는 멀찍이 떨어진 맞은편에서 전등이 알록달록한 상점의 쇼윈도를 훔쳐봤고, 문밖을 나서는 가족의 단란한 얘깃소리를 들으며 발끝을 움츠렸다. 춥다. 고개를 툭 떨궜다. 잔뜩 풀이죽은 시선에 앞코 박음질이 다 떨어져가는 부츠가 담긴다. 그리고 손아귀 속 성냥갑 몇 개. 단지 그것만이 그녀의 것이었다. 환하게 추어올려지는 폭죽 소리도, 김이 유리창을 흐리는 따뜻한 저녁상도, 친근하거나 데면데면할 누군가도, 세상은 죄다 제 몫이 아닌 것들로 가득 차 있다. 너무도 쉽게 외로움에 사무쳤다. 그러니 그날, 누구든 그녀의 구원이 될 수 있었다.
"꼬마. 성냥 이거 아직 팔아?"
...아. 여주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손에 스치는 날붙이의 감각이 소름끼치도록 차다. 얼떨결에 내려다 본 그곳에는 제 손바닥만한, 아니 그보다 한 뼘 정도 더 긴 단도가 놓여 있다. 저만치서 새 과녁을 정비하던 태형이 무덤덤히 일렀다.
"칼이 힘들면 총. 잘만 쏘면 너한테 안 튈 거고."
"네? 무슨 소리신지..."
"피 말이야."
너도 나도 죽으면 나오는 그거. 여느 사람들이라면 입에도 담기 꺼려할 주제를 오늘 날씨 좋다, 하는 식으로 말한다. 아무리 뭐든 해낼 수 있다고 석진에게 장담해 두었다 해도, 아직 이 적나라한 뒷세계에 적응되지 않은 여주는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 아, 그... 피..."
"그런데, 보면 볼수록 이상하다니까."
여주가 느리게 칼에서 손을 물리던 차에 태형이 등을 돌리며 한창 아구를 맞추던 과녁 손잡이를 놓았다. 덜컹, 소리내는 것이 현재 여주의 심장과 얼추 사정이 비슷했다. 한번 들뜬 것을 가라앉히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서, 여주는 그가 금세 제 눈앞까지 도달했다는 사실을 한 템포 느리게서야 깨달았다.
"우리가 사창가라도 관리하면 몰라, 두목 취향은 전부터 줏대 있게 돈하고 약뿐인데."
히죽 웃으며 고개를 갸웃이는 태형.
"너를 왜 주워왔을까."
여주는 당연하게도 그 물음에 답을 할 수 없었다. 당연한 것 아닌가. 모르는 문제에 무슨 사족을 더 붙일 수 있겠어. 게다가 석진의 손에 이끌려 이곳에 오게 된 순간부터, 여주는 암묵적으로 약속받은 거라고 생각했다. 함부로 구원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고.
"뭐야, 반응도 없고. 재미없게."
계속되는 묵묵부답에 흥미가 떨어진 태형은 애초 깊게 파고들 계획은 없었던 듯 금방 말머리를 돌렸다. 총 써본 적은 있나?
.
이불을 걷었다. 또 같은 꿈을 꿨다. 수마에서 벗어난 것이 무색하게 꿈속 남자가 놀랍도록 장면 그대로의 모습으로 제 옆에 앉아 있다. 세게 꼬집은 손등이 곧 아려와서 이것이 현실임을 받아들이는 데에 어려움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여주는 한 번도 그의 흐트러진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어디 아픈가, 싶어서. 곧 죽게 끙끙 앓더라고."
"읍. 입에서 쓴맛이..."
"사탕처럼 단 약이 있으면 좋겠지만. 뭐."
석진이 탁상에 놓인 캡슐을 흔들었다. 아, 약을... 여주는 괜히 목을 큼큼 다듬었다. 아무래도 한동안 연습에 매몰했던 게 이런 후유증으로 발현된 모양이다.
"거래가 곧이니까 너무 무리하지 마."
"사람을 해한다는 생각에 잠이 안 와요."
"그건 차안일 뿐이고, 우리 목적은 물건을 받아오는 거고. 잘 성사되기만 한다면 배운 걸 쓸 일은 없어."
"......"
석진의 아지트로 오게 된 날로부터 머지않아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젊어 보이는 외견 치곤 그의 명의로 된 이곳 저택은 너무 호화스러웠고, 곱게 자란 듯 보이던 첫인상에 비해 몸에 상처가 터무니 없이 빼곡했다. 그는 코사 노스트라코사 노스트라, 마피아야. 민윤기라는 남자가 그랬더랬지. 군더더기 없는 짧은 답이었지만 어떠한 말도 그보다 명쾌할 순 없었다. 얽힌 이상 알고는 있으라며 자리를 뜨던 뒷모습을 여주는 멍하니 바라봤다. 어쩌면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랑한다며 손에 칼을 쥐어주는 남자가 평범한 사람일 거라는 망상은 일찍이 접어둔 채이기에. 속에서 파도가 넘실댄다. 울렁임이 거세지는 것 같다. 석진이 그런 여주를 보며 물었다.
"믿지 못하는 눈치인데?"
곧, 단언했다.
"아닐 테지."
.....네. 잠시간 냉정한 낯을 띄우던 석진이 이내 여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온기를 주는 그의 미소는 변함이 없다. 친절 또한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렇게 얼음장을 걷고 있는 듯 차가운지. 손끝을 어루만졌다. 여주는 문득 이 일에 처음 발을 들이게 된 계기를 떠올렸다. 단지 그의 사람이 된다는 것에 눈이 멀어 무엇이든 하겠다 말하던 자신을.
"아저씨."
"응."
"아직 담배 피워요?"
느지막하게 그의 눈을 올려다 봤다. 한쪽 눈썹을 어슷하게 올리는 것이, 질문의 의중이 궁금한 듯해 보였다.
"제 말은... 아직도 성냥이 필요한 건지..."
목소리가 자꾸만 흐려졌다. 확신이 없어 그렇다. 석진은 이불을 꼭 쥐고 있는 손에 제 손을 겹쳐 올렸다. 따뜻하다. 미약하게나마 떨리던 손이 마법처럼 멎어들었다. 파블로프의 개. 그의 새검은 눈동자에 그런 제 모습이 비친다.
"김여주."
"......"
"일을 맡기는 건 그만큼 너를 믿어서야. 이 바닥에서 내 신뢰는 꽤 비싸거든."
훅 다가운 고개가 비스듬했다. 타인의 온기가 퍼지는 순간 눈이 크게 떠졌다. 작은 입술에서부터 느즈막하게 떨어지며 그가 덧붙였다.
"하물며, 사랑은 또 어떻겠어."
사랑. 사랑이라고. 심장이 빠르게 요동쳤다. 한 걸음 물러서야 이성적 판단이 가능하다. 자꾸만 자신을 좀먹는 늪에서 벗어나려면 멀어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하지만, 저렇게 달콤한 말을 하는데. 외로워 죽어버릴 것만 같았던 제게 그리도 쉽게 사랑을 속삭여주는데. 여주가 석진에게 와락 안겼다. 그의 목에 팔을 동여맸다. 저버릴 수가 없다. 퍽 다정다감하게 구는 남자가 설령 아무렇지 않게 손에 피를 묻히는 범법자에, 신사를 가장한 살인자라고 해도.
.
새까맣게 검칠이 되어 있는 캐딜락이 모래 바닥을 휘달렸다. 밤새 떨며 성냥을 팔았던 그때와는 사뭇 달라진 정경이다. 그도 그럴 게, 벌써 몇달이 훌쩍 가버렸으니. 1613번지. 폐건물인데 얼마 전 폭탄 테러가 있었던 자리라네. 석진이 쥔 무전기에서 상대 소리가 어렴풋 흘러나왔다. 틀림없이 아지트에 남아 있는 윤기의 목소리였다. 운전대를 제멋대로 휘던 태형이 겁도 없이 뒤를 홱 돌았다.
"거래 장소 삼으려고 건물을 통째로 날린 거야? 미친놈들."
"김태형, 앞에 봐. 돈이랑 사이좋게 타죽고 싶지 않으면."
"그거 좋네."
피실거리며 실없이 웃더니 갑자기 악셀을 밟는다. 전속력이다. 급작스러운 속력에 중심을 잃고 앞으로 휘청이려던 여주의 어깨를 누군가의 팔이 단단히 막았다.
"운전수를 갈아 치워야겠네. 그렇지?"
석진이 여유롭게 웃었다. 도통 웃음이 나올 상황이 아닌데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싶다가도 제가 몸을 실은 차가 다름아닌 마피아의 것임을 자각할 때즈음 여주의 의문은 자연히 수그러드는 것이었다. 입꼬리가 떨려왔다. 숨을 가다듬는다. 무게 탓인지 기분 탓인지, 안쪽 주머니 속 권총의 존재감이 내내 대단했다.
석진은 나오기 전 여주에게 머리를 묶고, 모자를 쓰라고 당부했다. 거추장스럽게 긴 노란 머리를 모자 속에 집어넣으니 언뜻 보면 남자 아이 같게도 보였다. 말은, 최대한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여주는 이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태형은 뒷자리를 아리송한 눈길로 바라봤으나 그것 또한 의미를 두지 않았다. 반발은 삼키고 순종을. 그게 석진이 가장 원하는 그녀의 모습이니까.
"가방 전달하고 물건은 챙겨서 나와. 건물 밖으로 뒤따라 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즉시 연락하고."
여주의 손에 무전기가 쥐어졌다. 전파가 잡혀 있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아저씨도, 저랑 같이 가는 거죠?"
"글쎄."
"네?"
"우리쪽 거래 인원은 한 명이야."
뭐가 쿵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정확히는, 그것에 제가 형체도 없이 짓뭉개지는. 석진은 여주가 제 앞에서 세상이 무너지는 양 굴어도 눈 하나 깜짝 않았다. 그런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온기를 바랐지만 얇은 실크 장갑을 낀 손은 더이상 여느 때처럼 따뜻하지 않았다. 앞전 보고 대로 콘크리트 파편이 바닥에 부산스레 널려 있다. 적막한 거리. 태형이 운전석에서 튼 라디오만이 어둠을 메웠다.
"어서."
싸늘한 목소리가 가슴을 깊이 찌른다.
.
규모가 큰 갱단이라던 상대 조직에서 나온 이는 셋뿐이었다. 실상 이쪽은 사람 하나라 셋이 적은 것도 아니다. 널려 있는 부자재들, 깨져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양주병 따위가 여주가 발을 들인 장소를 더욱 날 것의 분위기로 물들였다. 벽에 간간이 나 있는 구멍을 제외하고는 사면이 다 막힌 구조. 차마 긴장을 떨칠 수 없었다.
"오호라, 못 보던 얼굴인데."
가장 중앙에 앉아 있던 자가 여주를 위아래로 야금야금 훑었다.
"하다 못해 애를 보냈군. 지독한 놈."
혀를 쯧 차대던 중년의 남성은 이내 주머니에서 두터운 시가를 꺼내 물었다. 꼬마야. 돈은 가져왔니? 부하처럼 보이는 하나가 그 끝에 비싸 보이는 금속 라이터를 붙여 켰다. 칙, 하는 소리에 여주는 불현듯 몸을 파들 떨었다. 주름져 올라가는 입꼬리가 어쩐지 음습하다.
"말을 해야지."
"......"
"네 새파란 주인이, 약속한 돈은 쥐어 보냈느냐고."
석진의 말도 있었지만, 왠지 모를 선뜩함에 입을 뗄 수 없었다. 그럼에도 거래는 성공해야 했다. 그것이 신뢰를 담보로 한 둘 사이의 약속이기에. 입구에서 우뚝 멈춰 섰던 걸음이 느리게나마 움직임을 시작했다. 그들 앞에 놓인 성한 곳 없는 둥그런 목재 탁자. 그 위에 여주가 돈가방을 올렸다.
"열어 봐라."
남자의 지시 뒤로 옆사람이 가죽 가방의 아귀를 벌렸다. 어쩐지 무겁더라니, 눈대중으로도 달러가 묶음으로 수십 개 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얼굴에 흡족함이 차올랐다. 성공, 인가? 주머니 속 총을 쥐지 않아도 됨에 여주가 안도했다. 방심한 틈을 타 누군가 제 모자를 벗겨내기 전까지는. 아...! 외마디의 탄성이 일자 시야에서 긴 머리가 나풀거렸다.
"여자애?"
남자가 헛웃음을 내지었다.
"...뭐, 우리야 이득이지."
잡아. 명령이 떨어지자 여주에게 양옆의 두 남자가 달려들었다.
***
태형이 운전대를 툭툭 두드렸다.
"왠가 했더니. 이럴 용도로 주워온 거였어?"
"아편을 원하는 고객이 있어."
"두목은 알잖아. 그거 빌미로 저쪽, 이번 기회에 아주 인질이라도 잡아서 우리 세력 먹겠다는 식이야."
일 대 삼이 말이나 돼? 척 봐도 밑지고 들어가는 내기를 왜 하냐고. 황량한 벌판에 대고 그가 비아냥거렸다.
"그럼 너를 보낼까?"
석진의 눈이 한층 사나워졌다. 왜 때문에 이렇게 예민한 건지는 모르겠다만 지금은 그랬다. 때는 여주가 그들과 이제 막 접촉한 순간이었다. 폐건물 속 상황은 언뜻 바라던 바대로 전개되고 있었다. 원래 그러려고 데려온 애야. 조직과 아무 연고도 없는 길거리 사생아라서. 거짓은 없었다. 인질을 부러 손아귀에 쥐어주고 그들이 방심한 틈을 타 물건을 빼앗아 오는. 그게 분명 석진의 초기 계획이었다. 조수석 등받이에 팔을 걸친 태형이 그에 지지않고 대꾸했다.
"한 번 쓰고 버릴 애한테 모자 써라, 목소리 내지 마라, 별 참견을 다 하시던데."
"...여자애인 걸 들키면 일이 복잡해져."
"그런 논리면 건장한 남자를 데려오는 게 맞지 않나?"
"......"
"재미로 데려왔다기엔 쓰임새가 너무 거창하고. 거래에 쓰겠다는 계획 치고는, 너무 애지중지하고."
도대체 뭐야? 석진은 답하지 않은 채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정장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라이터가 잡히고, 잇따라 성냥갑이 손끝에 툭 닿았다. 어느 것을 사용할지는 그리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줄곧 조용하던 무전기에서 윤기의 보고가 흘러나왔다.
"상황이 안 좋아."
불붙인 끝에서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무래도 인질이 잡힌 것 같다."
석진의 미간이 이그러졌다.
***
우선은 구석으로 몸을 피하긴 했어도 다리가 후들거리는 탓에 다음 기회가 존재할지도 불분명했다. 호흡이 가빠온다. 주머니를 다급히 뒤적이던 차에 여주에게 잡히는 것은, 우연찮게도 총이었다. 머리를 맞춰야 죽어. 아니면 걔들 좀비마냥 다시 살아난다? 그러니까 애먼 뒷통수 맞기 싫으면 이마 정중앙을 저격해. 태형의 장난스럽고, 어딘가 잔인한 구석이 있는 가르침도 모두 기억난다. 찰나에 무수한 생각이 밀어닥쳤다. 죄의식보다도 생존 본능이 일어난다. 쏴야 해. 손가락만 까닥 하면 쏠 수 있는 지근 거리. 더 멀어져서도, 가까워져서도 안 된다. 죽이려면 지금이 가장 적절하다. 여주는 땀에 전 오른손으로 황급히 총을 꺼냈다. 그리고,
틱.
"......"
장전을... 해놓지 않았던가. 당황한 기색의 남자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벙찐 여주를 비웃었다. 그리고는 빠르게 저들 허리춤의 총을 빼들었다. 사나운 총구가 되레 여주를 향한다. 눈을 질끈 감았다.
탕.
탕.
탕.
총 세 번의 피격음이 들렸다. 귀가 찢어질 듯한 비명은 없었다. 딱히 어디가 고통스럽지도 않았다. 다만, 발밑에서 탁한 피비린내가 스멀스멀 올라올 뿐이었다. 못 박힌 풍선처럼 바람 대신 머리를 가득 채운 흥건한 핏물이 여린 흐름을 그리며 바닥을 적셨다. 꼭 파도 치는 해변가 같았다. 여주는 그 잔혹한 모래성 앞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망연하게 바닥을 짚었다. 허릿춤에 달린 무전기가 희미하게 지직거렸다. 거래 무산. 정리하고 복귀한다. 텅 빈 폐건물에 무거운 발소리가 공명했다.
"...아저씨."
석진은 김이 새는 총을 저멀리 던져버린다.

"가자."
그녀에게 손을 뻗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