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집

[윤기] 사계절

영원할 줄 알았다. 처음으로 씨앗을 흙에 묻고 매일 같이 물을 줬다. 하루, 이틀…일주일, 한달…새싹은 금방 모습을 들어냈고 더할나위없이 위로 솓아났다. 너무 물을 많이 주었던 탓일까, 파릇했던 가지들과 잎들은 점점 시들어갔고 하나 둘 떨어져나가기 시작했다. 너무 과한 사랑도 그들에겐 독이되었다. 나는 사계절 내내 너에게 그런 물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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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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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소복이 내린 아침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을 끄고 졸린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창밖은 흰색으로 가득한 도로가 펼쳐있었고 하나 둘 아침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여주
“조금 더 잘까..”

옆에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윤기가 내 쪽으로 돌린 채 가벼운 숨을 내쉬며 자고있다. 난 최대한 조용히 침대에서 걸어나와 화장실로 향했다.

덜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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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났으면 나 먼저 깨우지, 나도 칫솔 줘“

화장실 문이 열리곤 대뜸 자다 일어난 윤기가 눈을 비비며 날 바라본다. 머리는 정리도 안 되어있고, 금방 자다 일어나 퉁퉁 부운 모습이 내겐 마냥 귀엽기만 했다.

여주
”왜 깼어, 오늘 연차낸거 아니야?“

윤기
”나 추운데 너가 휙 하고 가버려서, 추워서 깼어“

여주
”나이가 몇 갠데..아직 일어나기 이르지않아? 더 자“

윤기
”같이 더 자자, 너 없이는 춥다니까“

우리의 첫 겨울은 유난히도 추운 한파속보의 연속이였지만 함께한 일상들은 누구보다 따뜻하고 다정했다. 그렇게 겨울을 가장한 다정한 계절을 보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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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주위로 수많은 연인들이 스친다. 가로수들은 어느덧 분홍빛 옷을 입고 한강으로 풍덩 빠져든다. 서로 사진을 찍는 연인들, 돗자리를 펴는 연인들, 강아지와 함께 산책을 하는 사람들. 온 세상이 이 계절을 사랑했다.

윤기
“아직 추워, 목도리 잘 매줄게, 이리 와봐”

길게 뻗은 손은 내 목에 매어진 목도리를 잡고 스쳤다. 흩날리는 벚꽃잎들과 윤기의 손에서 나는 향기는 여전히 다정하고 온기를 품은 듯 따뜻한 섬유향이 섞여 안정적이였다. 금방 꺼낸 건조기 속 수건처럼 그의 손은 포근했다.

여주
”윤기 너는 나한테만 다정하면 좋겠다. 맨날 맨날
다정해주면 좋겠어, 영원할 거 같아. 이 순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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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날 맨날 너한테만 다정해줄게, 영원히”

시간이 멈추면 좋겠다. 라는 말은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영원이라는 단어는 시간에서부터 비롯된다. 나의 시간은 윤기였고, 윤기는 나의 영원이였다. 그렇게 영원한 봄을 보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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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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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었다..‘라는 말이 있다. 청춘과 사랑을 그리듯 그리움의 여름을 묻혀 추억으로만 두는 말, 나에게 여름은 가장 길면서 게으른 계절로 추억되었다. 가만히 있어도 뜨거운 온도에 우리는 딱 붙어 더 뜨거운 여름이었다.

여주
”윤기야 오늘은 에어컨 빵빵 틀어두고 집에만 있을까?“

윤기
”전기세 감당되면”

여주
“…치..덥단 말이야, 에어컨 틀자 응?“

윤기
”안 돼“

그렇게 처음으로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윤기는 자신의 탓이라며 밤새 내 옆을 지켜주었다.

여주
”나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윤기
“사다줄게”

여주
“나 배고파”

윤기
“만들어줄게”

여주
“나 너랑 이렇게 누워만 있을래, 하루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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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공주님 말 따라야지”

가장 게으른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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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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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색이 가득한 계절이 찾아왔다. 슬슬 붕어빵 트럭이 모습을 보였고 길거리엔 꾸릿한 냄새로 가득했다. 한번 그 냄새를 밟았다가 일주일동안 냄새가 안 빠져 큰 고생을 했다.

여주
“악-! 나 은행밟았어..흐잉..윤기야 도와줘..”

윤기
”초딩이네 아직 애야“

여주
”후우잉..냄새 나..“

내가 울먹거리자 윤기는 뒤도 안 돌아보고 가던 길만 걸었다. 내심 서운한 마음을 숨기고 집으로 돌아가 나릇한 햇살에 낮잠을 자고 일어났다. 집안에 퍼진 꼬릿한 냄새와 은은한 비누냄새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여주
”윤기야 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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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쳐잠든듯한 윤기의 모습 뒤로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흰 운동화가 빨래줄에 한켤레씩 걸려있었다. 윤기의 품에서 나는 비누냄새는 날 한 번 더 미안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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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팅남
”가장 좋아하는 계절 있으세요?“

그렇게 사계절이 지나고 영원할 줄 알았던 그의 잎이 하나 둘 떨어져 결국 나 혼자의 시간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시간은 내가 따라잡지 못 할 정도로 빠르게 지나갔고 그와의 사계절은 그렇게 추억에 묻어두었다. 

여주
“사계절 모두 좋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