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 오후5시
오늘도 한결같이 하기 싫은 등교를 하고
하루 종일 잠에 빠져 학교가 끝난 줄도 모르고 자던 여주는
책상 위에 쌓인 공책과 연필, 교실 바닥에 흩어진 종이들을
멍하니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수업 종이 울리는 순간, 평소 같으면 친구들의 웃음소리와
선생님의 발걸음 소리가 뒤섞여 어수선했을 텐데..
오늘은 뭔가 이상했다.
밖에서 부는 바람으로 흔들리던 커튼은 고정되어 흔들지
않았고 창문 너머로 날아가는 새들의 날갯짓도 멈춘 채
공중에 멈춰 있었다.
친구들의 웃음소리, 연필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심지어
종이 넘어가는 소리까지 한순간에 모든것이
멈춰 소리와 인기척은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 처럼 사라졌다.
처음엔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리고, 눈앞이 흐려질 것만
같았다.
“ 설마… 내가 미친 걸까? ”
속으로 중얼거리며, 손끝으로 책상을 짚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 나갔다.
교실 바닥의 먼지 하나까지 정지한 듯 눈에 들어왔다.
여주가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자신의 발끝에서 나는 작은
소리마저 지금의 여주에게는 너무나 크게 들려왔다.
여주는 조심스레 복도를 걸었다.
발걸음 소리가 지금은 너무 크게 느껴졌다.
복도 끝, 피아노실 창가에 한 남자가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며, 아무 감정도 없는 듯
표정을 고정하고 있었다.
여주는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순간, 남자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 ….뭐야. ”
여주는 놀라며 몸이 굳었다.
조심스럽게 손으로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 너… 왜 움직여? ”
여주는 눈을 크게 뜨고 숨을 죽였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정국은 천천히 그녀 앞으로 걸어와 멈췄다.
그리고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
“ .... 일단, 내 이름은 임여주. 넌 이름이 뭐야? … 전정국?
명찰 색 보니까 동갑 같은데 말 놔도 괜찮지? ”
“ … 그러던가. ”
“ 내가 여기 어쩌다가 들어온 건진 모르겠지만 너가 나가는
방법 좀 알려줘야겠다. ”
여주는 숨을 죽이고 긴장한 채 정국을 향해 말했다.
정국은 잠시 교실 시계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 그냥 기다려.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돌아갈 거야.
걱정하지 마. ”
여주는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 넌 그걸… 어떻게 알아? ”
정국은 읽던 책을 덮고 피아노 건반을 손가락을 톡톡 튕기듯
두며, 살짝 미소 지었다.
“ 글쎄. ”
여주는 그의 대답에 답답하면서도 묘하게 마음이 놓였다.
그냥 믿기로 했다.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며, 멈춘 시간 속에서 단 둘만 존재하는 낯선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조심스레 정국의 옆 빈자리에 다가가 앉았다.
그 순간,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는 사이에 묘하게 따뜻한
기운이 흘렀다.
여주는 천천히 정국을 쳐다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그럼… 지금 우리, 그냥 이렇게 있는 거야? ”
“ 뭐… 그런 셈이지? ”
여주는 피아노 옆에 앉아 있는 정국의 손가락을 살짝 건들며
말했다.
“ 그럼 아무 말이나 해줘. 좀 무섭단 말야. ”
정국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여주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괜찮아. 여기서는 아무도 널 해치지 않아.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
여주는 그의 말에 조금 안도하면서도, 여전히 마음 한켠이
떨렸다.
“ 근데… 왜 넌 태연한 거야? 나 같으면 심장이 터지고도
남았을거야. ”
정국은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 아마 많이 겪어서 그런가 봐. 아니면… 그냥 여기가 익숙해서 그런지도.”
여주는 고개를 끄덕이고 숨을 고른 뒤, 정국의 옆에 앉아 눈을 감았다. 멈춘 시간 속, 정국이 곁에 있으니 마음이 조금 편했다.
졸음이 몰려오자, 여주는 자신도 모르게 정국의 어깨에
기대 잠이 들었다.
정국은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또 보자.”
.
.
.
잠에서 깬 여주는 눈을 비비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교실에는 학생들이 움직이고 있었고, 종소리도 울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이었다.
하지만 정국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여주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 전정국.… 어디 간 거지? ”
정국의 존재를 찾으려 일어난 순간, 항상 같이 하교하던
친구들의 부름에 여주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 여주야, 왜 이렇게 멍하니 있어? ”
여주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 아… 자다 깨서 그런가봐. ”
친구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웃으며 그녀를 재촉했다.
“ 그럼 얼른 가자, 우리 오늘 시내가기로 약속했잖아~ ”
여주는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말했다.
“ 어… 그래, 가자. ”
여주는 마음속으로 정국을 떠올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친구들과 함께 걸으면서도, 머릿속에는 멈춘 시간 속에서의
조용하고 따뜻한 순간이 계속 맴돌았다.
“오늘은 좀 많이 피곤해 보이네?”
친구 중 한 명이 여주를 힐끗 보며 물었다.
여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 응… 좀 졸렸어. 잠을 너무 많이 자서 그런가..? ”
발걸음이 느릿하게 이어지는 동안, 여주의 마음속에는
멈춘 시간 속에서만 느낄 수 있었던 작고 특별한 순간이
조용히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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