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오후5시
이틀 후, 여주는 다시 그 멈춘 시간에 들어왔고 정국을
만나기 위해 조심스레 복도로 나섰다.
모든 것이 정지한 교실, 숨을 죽인 채 발걸음을 떼자,
익숙한 고요함 속에서 정국이 기다리고 있었다.

“ 여주야, 나 여깄어 ”
정국의 낮은 목소리에 여주는 안도하며 가까이 다가갔다.
여주는 가슴이 뛰는 걸 느끼며 천천히 다가갔다.
“ 뭐야..전정국… 나 기다렸어? ”
조심스레 말을 꺼냈지만, 그 말에 담긴 기대와 긴장이
자신도 모르게 떨렸다.
정국은 고개를 들어 여주를 바라보았다.
“ 기다리기도 했지만… 네가 올 거라 예상했어. ”
그 말투에는 살짝 장난스러운 여유가 묻어 있었지만,
눈빛은 진지했다.
그 다음 이틀 후에도, 똑같은 풍경과 만남이 이어졌다.
둘만의 시간 속에서 여주는 점점 정국에게 마음을 열고,
정국 역시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 다음 이틀 후, 여주가 잠에서 깨어나 교실을
바라보았을 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멈춘 시간은 오지 않았고, 교실은 평소처럼 학생들의
웃음소리와 종이 넘기는 소리로 가득했다.
‘ 왜… 오늘은 안 멈춘 거지? ’
여주는 숨을 고르며 이틀, 또 이틀 기다렸지만, 시간이
멈추지 않았다.
결국, 일주일 동안 그녀는 단 한 번도 정국과 그 공간에서
마주할 수 없었다.
여주는 불안과 혼란 속에서도 마음 한켠에 남은 기억을
붙잡으며, 다시 올 그 시간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여주는 학교에서 하루를 보내며 마음 한켠이 계속 무거웠다.
‘ 다시… 그 시간이 올 수 있을까? ’
한 주 동안, 그녀는 매일 창밖을 바라보며 그 순간을 상상했다.
어느 날은 운동장에서 혼자 걷고, 또 어느 날은 교실 구석에서 몰래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일주일 후, 그 순간이 찾아왔다.
모든 것이 조용히 멈추고, 바람과 소리도 사라졌다.
중얼거렸다.
“ 드디어…! ”
그녀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나섰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정국은 보이지 않았다.
“전정국…? 어디 있는 거지?”
발걸음을 빨리 하며 복도를 이리저리 살펴봤다.
“ 왜…? 무슨 일이 생긴 건가? ”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복도는 여전히 고요했다.
여주는 잠시 멈춰 숨을 고르며 생각했다.
“ 아냐, 그럴 리가… 그냥 조금 늦은 거겠지. ”
하지만 마음 한켠의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근데… 왜 안 보여? 진짜 없는거야..?”
머리를 부여잡고 발걸음을 떼기도, 멈추기도 하며 그녀는
공황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정국이 없다는 사실이 점점 현실처럼 다가왔고, 숨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 뒤에서 급하게 달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 임여주! 괜찮아? 왜 그래? ”
정국이 황급히 나타나 여주에게 다가왔다.

여주는 떨리는 몸을 정국에게 맡기며, 안도의 한숨과 함께
그를 끌어안았다.
여주는 놀라면서도 그녀를 단단히 감싸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괜찮아, 나 여기 있어. 아무 일 없으니까… 진정해. ”
여주는 정국의 품에서 떨리는 마음을 천천히 가라앉히며,
멈춘 시간 속에서 둘만 존재하는 따뜻한 현실을 다시 느꼈다.
여주는 정국의 품에서 조금씩 숨을 고르며 고개를 들었다.
“ ... 어디갔었어? 찾았잖아 ”
그녀의 눈에는 안도와 여전히 남아 있는 떨림이 섞여 있었다.
정국은 잠시 숨을 고르며, 여주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 미안… 조금 늦었어. ”
여주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 보고싶었어 ”
정국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살짝 미소 지었다.
“알아. 그래서 내가 이렇게 달려온 거야. 너 혼자 두고
싶지 않았어.”
여주는 그의 품에 더 파고들며 작은 숨결을 내쉬었다.
“여기서 넌 항상 곁에 있어 줄 거지?”
정국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눈빛 한켠에 뭔가 알고 있는
듯한 묘한 표정을 띠었다.
“응… 항상 여기 있을게.”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말 속에는 조금 복잡한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여주는 그의 눈빛을 보며 마음속으로 의문이 피어올랐다.
‘왜… 정국이는 이곳에 있는 거지? 그리고 왜 이번에는
일주일이나 걸린거지…? ’
그녀는 최대한 긴장을 누르고, 정국과 함께 조심스레 멈춘
시간 속 복도를 산책했다.
발걸음마다 고요함이 감돌았고, 둘 사이에는 묘하게 따뜻한
공기가 흘렀다.
여주는 정국의 품에서 천천히 숨을 고르며 물었다.
“ 전정국. 너 여기… 언제부터 있었던 거야? ”
정국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

“ 음… 얼마나 오래됐는지… 솔직히 나도 잘 기억이 안 나.
꽤 오래전부터… 아마, 네가 알 수 있는 시간보다 훨씬
이전부터였던 것 같아. ”
여주는 눈을 크게 뜨며 이어서 물었다.
“ 그럼… 왜 하필 학교야? 왜 여기가 이 시간의 장소인 거지? ”
정국은 잠시 피아노 건반을 톡톡 튕기듯 두드리며 대답했다.
“ 그냥 여기였어. 와보니까 여기였고… 그뿐이야.”
여주는 당황한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 그럼 넌… 실제로 존재하던 사람이었던 거야?
인생을 살던? ”
정국은 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응, 당연하지 나도 한때는 평범하게 살던 사람이었어.
하지만 지금 이곳에서는… 그냥 이렇게 존재할 뿐이지. ”
정국은 잠시 생각하는 듯 눈을 감았다가, 다시 여주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대답했다.
“ 여주야… 사실은… 이 시간이 오래 가지 않아. ”
여주는 순간 멈칫했다.
“뭐…? 오래 안 간다고…?”
정국은 침착하게 숨을 고르며 계속 말했다.
“ 응. 주변이 다시 움직이면, 넌 날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어. 이번엔 너가 운이 좋아서 날 기억한 거고 언젠가는 이곳을
잊게 될 거야. ”
여주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 그럼… 난… 어떻게 해야 해? 다시 올 수 있을까?”
정국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하지만 눈빛은 진지하게 말했다.
“ 그건 알 수 없어. 언제 또 여길 올 수 있을지, 시간이
허락할지 모르니까. 그러니까 난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싶어. 오랜만이거든. 누군가를 보는게 ”
여주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조용히 숨을 고르며, 정국과 함께 이 멈춘 세상 속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걷고, 이야기하며, 그 온기를 마음 깊이
새기려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