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전
그를 처음 본 날은
성인이 된 후 아버지의 기업 창립 기념일 애프터 파티에 처음으로 참석했던 날이었다.
대기업 주주들이 한껏 차려입은 모습으로
파티장 안으로 들어왔다.
회장의 딸 답게 천만원이 넘은 악세서리와
몇 달을 기다려 제작한 명품 드레스를 입고
위스키를 한 모금씩 홀짝이고 있었다.
아버지와 요즘 골프를 친다던 TH 그룹 회장이
위엄을 뽑내며 다가왔다.
"회장님, 축하드립니다"
"아유, 다 직원들 덕이지. 자네 아들인가?"
"아, 따님과 동갑입니다. 인사드려라"

"안녕하세요. TH 그룹 후계자 강태현이라고 합니다"
"어우~ 인물이 훌륭하네"
"별말씀을요 ㅎ"
"여긴 내 딸일세. 너도 인사 드려라"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시간 보내세요."
"허허 이 노인네들끼리 마시러 가야겠구나.
곧 선 볼 상대이니 잘 하고있어라"
아버지와 TH그룹 회장이 우리 둘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다른 곳으로 향했다.

"앉아서 이야기 나누실까요?"
"좋아요 ㅎ"
강태현의 권유로 파티장 구석에 앉아
둘이서 술으로 한모금씩 목을 축였다.
"오늘 아름다우시네요"
짜릿했던 첫만남 이후 정식으로 선을 봐
결혼을 약속한 사이가 되었다.
계약결혼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서로를 사랑하고있었다.
하지만...
그때 알았어야 했다.
글로벌 톱티어 기업이라고 불리던
TH 그룹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는걸...
정식으로 한 가족이 된 이들과의 식사 자리를
하루 앞둔 날 이었다.
"아가씨, 회장님께서 서재로 부르십니다"
자정이 한참 지난 새벽
내일 약속을 위해 차려입을 옷을 고르던 중
아버지의 부름에 서재로 걸어갔다.
끼이익 -
천장에 달린 조명이 희미한 주황빛을 내며
책상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버지, 부르셨다고.."
서서히 돌아간 의자 위엔 익숙한 실루엣이 앉아있었다.

"오랜만이야 자기"
책장 끝 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
서늘한 기온이 맴돌고있었다.
벽에는 아직 생생한 온기를 담은 피가 흩뿌려져있었다.
"...여...주야.."
"아버지!"
서둘러 아버지에게 달려가 상태를 확인했지만
이미 피가 많이 나 정신을 빼놓은채
쓰러져 계실뿐이었다.
"늦었어"
손 끝에서 느껴지는 아버지의 체온은
이미 서서히 사라져 느껴지지 않았다.
눈물은 눈가에서 한방울씩 떨어져
아버지의 차가운 뺨을 타고 흘렀다.
나에게 다가오는 그의 실루엣은 누구보다도 잔인했다. 그는 웃고 있었지만, 웃음 뒤에는
차가운 집착과 경계 없는 집요함이 숨겨져 있었다.

“모두 죽었어. 넌 완전히 혼자라고.”
원래 사람은 죽기 전 행복한 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는데
왜 난 지옥같은 악몽이 떠오르는걸까
"조금만 더 살아.
아직 널 망가뜨릴 기회가 남아 있으니까.”
알 수 없는 목소리는 마치 나를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현실과 꿈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몸과 마음을 흔들었다.
내 숨을 턱 막히게 하던 차가운 물살은
어느순간 더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누군가의 품에 안긴 채,
생애 처음 느껴보는 듯한 온기가 나를 조용히 감쌌다.
그는 처음보는 얼굴이었지만,
세상을 다정하게 품듯 나를 바라보았다.
젖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넘겨주며,
그 따듯한 시선 속에 묘한 안정감이 스며들었다.

"일어났어?"
"...?"
"ㅋㅋ 춥지? 그러게 왜 뛰어
죽지도 못할텐데"
"..누..누구세요"
"나? 너랑 계약하러 온 악마"
소름끼치는 미소를 지으며 그의 무릎을 베고 누운
내 머리카락을 찬찬히 쓸었다.
그의 손이 내 피부에 닿는 순간 심장이
순간 움찔하며 날 벌떡 일어나게 했다.
"...그게 무슨.."

"계속 뒷걸음질 치면 너 비 맞을텐데?
도망가려하지마. 어차피 못가니까"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를 째려보며 뒷걸음질 치는
내 손목을 잡아채 자신쪽으로 확 끌었다.
"계약하자. 나랑"
"..."
"대신 조건이 있어"
"뭔데...?"
"내가 소원 3개 들어줄게.
대신 10년 뒤 네 몸을 나한테 줘"
"...그게 다야?"
"물론, 다는 아니지"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검은 불꽃이 폭죽처럼
흩어지며 계약서가 형체를 드러냈다.
"자- 여기에다 싸인하면 돼"
여전히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하더니 이내 말을 꺼냈다.
"..널 어떻게 믿을 수 있는데"

"뭐?"
"너가...악마인걸 믿냐고"
"뭐 비라도 멈춰볼까?"
그가 손가락 한번을 튕겼을 뿐인데,
주변을 가득 채우던 요란한 빗소리가 금세 사라졌다.
"..."
"아직도 못 믿겠어?"
"..."
"하..손 잡아"
내 손을 꽉 잡은 그가, 손가락을 한번 튕기자
불과 몇분 전 내가 떨어졌던 그 다리 위 모습이 보였다.

"뭐...쟤 죽이기라도 해줄까?"
몇분 전까진 혼자였던 강태현이 어느새
자신이 부른 조직원들에게 둘러싸여
입 밖으로 뿌연 연기만 뱉을 뿐이었다.
"어이, 거기~"
마치 숲처럼 빽빽하게 모여있던 조직원들이
악마의 부름에 일제히 뒤를 돌아보았다.

"어? 윤여주네"
나를 발견해서 기쁘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난 빈말 안한다~ 죽여도 되지?"
"...그냥...지켜줘, 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