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Slowly)

제 2화 : 우리의 새벽은 낮보다 뜨겁다




” 어떻게 시작해야 돼 ..? ”



이 시골로 내려와 내가 꼭 지키기로 한 것이 2가지있다. 하루에 한 페이지씩의 일기를 쓰는 것, 그리고 할 것이 없을 땐 무조건 산책을 하는 것이다.

무작정 누워있는 것만이 쉼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20대때 깨달았기에 여기에 온 이상 나만의 휴식방법을 찾아볼 것이다.

그런데,



“ 어떻게 나이 31살을 먹고 일기 한 장을 못 쓸 수가 있지 .. “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사도 콘티도 기획안도 영어로, 일본어로도 다 쓸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일기는 한 글자도 시작을 못할 지도 모른다.

자신의 내면보다는 외면을 먼저 가꾸고 타인에게 가꾼 외면을 먼저 인정 받아야만 비로소 내면을 꾸밀 여유라는 것을 갖게 되니까

어떻게 보면 내면을 꾸밀 시간을 먼저 갖고 그 이후에 외면을 꾸밀 여유를 얻어야 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말이다.

나 또한 포함되는 이야기이고 말이다.



“ .. 몰라 이따 밤에 쓰자 ”



결국 한 글자도 시작하지 못한 채 노트북을 덮어버리고 말았다.



또 할 것이 없어진 나는 이번엔 무작정 밖으로 나가 산책을 시도했다. 그래 설마 산책도 못하겠어 ?


잠시 후,

위이잉 -



"… "



탁 -



” .. 아씨 벌레 “



툭 -


“ 하 .. ”


옆쪽에 있는 논 사이에 있는 길로 무작정 걸어 어딘지 모를 풀만 무성한 곳에 도착했는데 도시에선 세스코에게 모두 박멸되었을 벌레부터 고대멸종생물을 닮은 놈들까지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서 백과사전에 있는 벌레들을 모두 관찰할 수 있을 듯 싶었다. 아 거기에 들어가려면 곤충이어야 하나


결국 또 지친 나는 뒤돌아 집으로 향했다.


“…”


내가 해온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것 같다는 사실에 괜히 더 우울해졌다. 내가 그동안 31년간 배워 온 것은 한 순간 사라져버렸는데

그럼 난 다시 그 긴 시간동안 다른 무언가를 배워야 하나

아님 그냥 이대로 고독사라도 하는 것일까


사실 현타에 가까웠다. 현실자각타임이었다. 나의 이 시궁창보다도 최악이 된 지금의 현실을 자각하게 되었고 내 예상과 똑같이 우울하기 짝 없는 현실에

더욱 더 우울해지고 그걸 계속 반복했다.


난 애써 우울한 생각이라도 없애보고자 잠을 청했다. 아니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건 ‘잠’ 밖에 없었다.















[천천히]

















쾅쾅쾅 -



“..?”

” 여주씨 ~ ! 안에 계세요 ?! “

” .. 순영씨 ? “



 또 누군가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난 잠에서 깨었고 시계를 확인해보니 새벽 2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이 밤에 또 무슨 일이길래 ..

난 대충 슬리퍼만 꾸겨 신고 대문으로 나갔다.



끼익 -



” 이 밤에 왜 ..? “

” 아 혹시 주무시고 계셨어요 ..? “

” 방금 막 깼네요 “

” 사실 다름이 아니고 .. “

"..?"



스윽 -



” 이게 뭐에요 ..? “

“ 열어보세요 ”



권순영씨는 내게 무언가가 가득 담긴 검은 봉지를 건넸고 안을 보니 맥주와 여러 안주들이 있었다.



“ 이걸 왜 ..? ”

“ 오늘 그 윤씨네 할머니께서 칠순잔치를 하셨는데 음식 좀 드시라고 갖고 왔어요 ”

“ 아 ..! 감사해요 “

” 네 ! 그럼 .. 저는 이만 가볼게요 ”



처음 사귄 친구치고는 꽤나 인정이 좋은 사람인 것 같다. 근데 뭐 이렇게까지 줬는데 같이 먹자고 물어보는 게 예의긴 할 것 같다. 사실 혼자 먹고 싶은데

에이 시간도 시간인데, 설마 먹는다고 하겠어 ?



“ 짠 ~ ”

“ .. 짠 ~ ”



생각보다 많이 수용적인 사람이다. 이걸 받아주시네 ..



“ 오 .. 맛있다 “

” 그쵸 ? 김치전이 진짜 맛있다니까요 ”



그래도 갖고 온 음식들이 하나같이 다 맛있어서 봐주기로 했다. 근데 진짜 다들 음식솜씨가 좋으시네 .. 나도 음식이라도 할 줄 알았었으면 ..



“ 근데 여주씨는 오늘 하루 뭐하셨어요 ? ”

“ 네 ..? 아 그게 .. ”

“..?”

” 그러니까 .. ”



괜히 말하기 창피해졌다. 진짜 망해서 여기 놀러 먹으러 온 백수 같으니까 그래도 나름 직업도 있고 그랬었는데


그때,



“ 천천히 말씀하셔도 돼요. “

"..?!! "

” 아 물론 말씀하기 싫으시면 안하셔도 좋구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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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좀 살아보니까 무조건,반드시 만큼 사람 옥죄어오는 조건이 없더라고요. ”

“…”

” 제가 이 천천리에서 31년 살다보니까 진짜 다른 사람들에 비해 행동도 느리더라고요 “

"… "

” 그러니까 저한테는 오히려 천천히 말씀해주셔야 제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거에요 “

"… "



처음이었다. 내게 천천히 말해도 된다고 먼저 이야기해준 것은 아니 무엇보다도 그 이유가 본인 때문이라고 말해주는 게 더 참신하고 좋았다.

그 말을 듣자 속에 있던 창피함은 모두 사라지고 그저 편안함만이 남아 정말로 쉬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사람과의 속도는 내가 쉴 수 있구나.



” 저 .. 사실 오늘 아무것도 못했어요 “

” 그래요 ? “

” 일기도 써보려고 하고 산책도 해봤는데 다 제대로 할 수가 없더라고요 ”

“…”

“ 사실은 제가 PD하다가 때려치고 여기 온 건데, 방송일 빼고는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아요 ”

“…”

“ 그래서 우울해서 그냥 자버렸어요 ”



정말 마법처럼 오히려 말하고 나니까 안에 있던 무거운 무언가가 사라진 기분이었다. 아니 사라졌다기 보다는 기체가 되어서 무게감 없이 둥둥 떠있는 것 같달까 ?



“ 여주씨는 되게 열정도 있으시고 완벽하신 것 같아요 ”

“ 아 ㅎ .. 직업병이죠. “

” 열정이 어떻게 직업병이에요, 그건 그냥 장점이지 “

” .. 그런가요 “

” 근데 지금은, 일이 아니라 쉬러 온거니까 일을 제대로 했다면 쉬는 건 좀 대충 해보는 건 어때요 ? “

"..?"

” 쉬는 걸 제대로 하려고 의식하는 순간 그마저도 일이 되던데 난 “

” ..!! 아 .. “



그렇다. 쉬는 건 일이 아닌데 왜 제대로, 완벽하게 하려고 했을까 .. 그냥 내가 편한대로 하면 되는 건데 ..

역시 쉬는 것이 제일 어렵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주고 받다 4시쯤 순영씨는 이만 들어가야겠다고 하셨고 어느정도 취기가 올라온 나도 이만 들어가야겠다고 했다.



” 오늘 즐거웠어요. 역시 친구는 많아야 좋은 것 같아 “

” 저도요. 오랜만에 좀 편했네요. “

“ .. 저기 여주씨 ”

“ 네 ..? ”

“ 내일도 혹시 할 거 없으면 .. 여주씨가 정말 할 게 없으시면 저기 태권도 학원으로 오실래요 ? “

” 태권도요 ..? “

” 배우시라는 건 아니고 ! 제가 거기서 일 하거든요. 그래서 쉬는 시간 때마다 이렇게 같이 얘기하고 그러면 좋지 않을까 싶어서요 “

” 아 .. ”

“ 또 잡생각 없애는 데 운동만큼 좋은 게 없거든요 ”

“ 고민 ..! 해볼게요 ”

“ 아.. 고민.. 그래요 ! 꼭 고민해보세요 ”

” .. 그럼 이..ㅁ “

” 여주씨 ..! “

” 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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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히 주무세요 ! ”

“ .. ㅎ 순영씨도요. 안녕히 주무세요 ”



그 말을 뒤로 순영씨는 집으로 가셨고 난 바로 방으로 들어가 씻지도 않고 바로 잠을 청했다. 그냥 왠지 모르게 그래도 될만큼 편했다.

정말로 몇년만에 편하게 잠에 들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나의 노트북에 딱 한 줄을 적을 수 있었다.


‘ 우리의 새벽은 낮보다 뜨겁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