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규칙이다. 최소한 겉으로는. 책장 뒤로 웅성이는 속삭임이나, 사서에게 들키지 않으려는 숨죽인 웃음 같은 건 어디에나 있지만, 모두 입을 다물고 있는 척은 한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리포트를 쓰러 왔다는 명분 아래, 나는 지금 책장 사이에 슬쩍 숨어 있었다.
꼭꼭 숨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드러난 것도 아니었다. 채봉구가 앉아 있는 자리가 내 시선에서 딱 보이는 거리였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채봉구'가 딱 보이는. 채봉구의 앞에는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책이 펼쳐져 있었다. 제목이 길고 딱딱한 활자체였다. '마법사의 윤리와 마법의 책임' 같은, 누가 봐도 재미없어 보이는 책.
그런데 그걸 그렇게 진지하게 읽고 있는 얼굴이 이상하게도 눈에 밟혔다. 시선은 정확히 책 중앙을 향해 있었고, 손끝은 페이지를 넘기기 직전, 아주 잠깐 멈춰 있었다. 그 짧은 멈춤이 왠지 익숙해 보였다. 실습 때 줄자 들고 재던 그 손. 도마뱀을 제압하던 그 손. 그리고 그 표정.
'진짜, 뭐야 저 사람은.'
나는 괜히 책을 한 권 꺼내 들었다. 표지는 보기에도 낡아 있었고, 먼지가 살짝 묻어 있었다. 내용도 제대로 보지 않으면서 책장을 넘겼다. 시선은 자꾸 그쪽으로 흘렀다. 물론, 들키지 않을 정도로만. 그래야 억울하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그가 자리를 비웠다. 갑작스러웠다. 책갈피도 없이 책을 덮고 일어섰다. 어딜 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가방도 안 챙긴 걸 보면 금방 돌아올 모양이었다. 나는 시선을 돌렸다가, 책상 위에 놓인 책을 다시 바라봤다.
이상하게도, 발이 움직였다. 내가 왜 그랬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책 제목을 확인하려는 의도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어느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채봉구가 앉아 있던 그 의자에.
책을 펼치자 생각보다 복잡한 문장이 이어졌다. 오래된 마법의 윤리, 법적인 경계선, 제한 마법의 구조와 정당성. 진짜로 재미는 없었다. 그런데 책장 귀퉁이에, 누가 연필로 적어둔 작은 메모가 있었다.
'이건 언론 마법 쪽으로도 연결된다.'
글씨는 반듯했고, 습관처럼 쓰는 방식이었다. '글씨 예쁘네.' 괜히 속으로 그런 말을 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나도 모르겠어서, 책을 얼른 덮으려던 찰나였다.
“지금 뭐 하는 건데.”
깜짝 놀랐다. 채봉구가 등 뒤에 서 있었다.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방금까지도 책 위에 손을 올린 채, 거기 앉아 있었으니까. 딱 봐도 몰래 훔쳐보는 그림이었다. 머리를 굴렸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설명을 할까, 아니면 그냥 웃어넘길까.
“…잠깐, 자리 맡아주고 있었어요.”
내가 그런 말을 했다.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지만, 목소리는 생각보다 자연스러웠다. 채봉구는 내 쪽으로 조금 걸어왔다. 책상 위를 한번 보고, 나를 봤다. 그리고 아주 느릿하게 물었다.
“페이지를 넘겼잖아.”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들켰다. 명백하게. 그런데도 나는 뻔뻔하게 덧붙였다.
“그래서요? 뭐, 궁금하면 볼 수도 있는 거죠.”
그 말에 채봉구는 눈썹을 아주 조금, 아주 미세하게 찌푸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한쪽 책장을 향했다. 그쪽으로 걸어가며 짧게 말했다.
“다 읽고 갖다 놔.”
그 말이 그렇게 들렸다. ‘봐도 되니까, 네 맘대로 해라.’ 아닌가. 그냥 기분 탓인가. 나는 괜히 책장을 펼쳤다. 연필로 그어둔 밑줄을 따라가며 생각했다. 다음에 보면, 물어보고 싶은 게 생길지도 모르겠다. 그땐 내가 먼저 말을 걸어볼까. 아니, 왜 그런 생각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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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나는 그 책이 자꾸 눈에 밟혔다. ‘마법의 책임과 마법사의 윤리’. 제목도 딱딱했고, 표지도 너덜너덜했으며, 누가 보기엔 그냥 그런 고서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누군가 연필로 적은 메모들, 밑줄, 그리고 그 책을 읽던 채봉구의 얼굴이 이상하게 머릿속에 남았다. …딱히, 그가 신경 쓰인 건 아니고. 정말로.
그래서 다시 도서관을 찾았다. 그날 그 자리 근처를 한참이나 맴돌다, 같은 책이 꽂혀 있는 구역을 발견했다. 마법 법학 카테고리. 평소 같았으면 절대 오지 않았을 구역이었다. 나는 시선을 흘리며 책등을 하나씩 훑었다. 간단한 책은 눈에 띄지 않았고, 복잡한 제목들과 학문적인 단어들뿐이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찾았다. 그 책을.
표지가 약간 찢어진 구석, 거기에 희미하게 연필 자국이 묻은 책이었다. 책을 꺼내는 순간, 괜히 심장이 조금 빨리 뛰었다. 이걸 다시 펼쳐본다고 뭐가 달라지진 않겠지만, 나는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겼다.
그런데.
“그 책, 일반 대출은 안 돼요.”
사서의 말에 나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반사적으로 책을 꼭 쥐었지만, 이내 어색하게 웃으며 책을 내밀었다. 사서는 조심스럽게 책을 받아 들고는 대출대 너머 어디론가 가져다 놓았다. 마음 한구석이 괜히 휑했다.
“예약 같은 것도 안 되나요?”
“해당 도서는 특별 관리 대상이에요. 교수님 허가 없이는 열람도 어렵습니다.”
단호한 말투에 나는 고개만 작게 끄덕이고 도서관 안쪽으로 걸어 나왔다. 책을 다시 펼쳐본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하지만 책에 남아 있던 필기들과 채봉구의 손끝이 떠오른 건, 전혀 예상 밖의 일이었다.
그렇게 멍하니 서가 옆을 지나가던 참이었다. 뒤에서 익숙한 발소리가 들렸다. 돌아보기도 전에 알 수 있었다. 채봉구였다.
그는 사서에게로 곧장 걸어갔다. 그리고 아주 짧고 단정하게 말했다.
“제가 빌렸어요, 그 책.”
사서가 고개를 들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멈춰 섰다. 채봉구는 여전히 이쪽으로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교수님 날인이 박힌 서류를 내밀고 사서와 대화했다.
“교수님께 허가받았습니다. 일주일 뒤에 반납할 거예요.”
사서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채봉구는 책을 받아 들었다. 그 짧은 상황이 지나가는 데 10초도 걸리지 않았지만, 나는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가 내 쪽으로 다가오며 말을 건넸다.
“사물함에 넣어 줄게.”
“…제 사물함이요?”
“어. 너 찾으러 올 줄 알았어.”
나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고개만 끄덕였다. 책 한 권, 단지 그뿐이었는데도 가슴 어딘가가 조용히 요동쳤다. 그는 짧은 눈인사만 남기고 걸어갔고, 나는 그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그날 밤, 내 사물함에는 얇은 복사본이 한 권 들어 있었다. 겉장은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지만, 펼치자 익숙한 필기와 밑줄이 반겨주었다. 그는 책의 앞뒤 일부, 그리고 본문에서 중요한 부분만 따로 복사해 정리해둔 모양이었다. 연필로 또박또박 남긴 메모도 그대로였다. 정돈된 글씨, 조용한 메모들, 그리고 그 모든 흔적들이— 낯설지 않았다.
나는 책을 덮고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이게 고작 책 한 권 때문인지, 아니면 그 책을 건넨 방식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마음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