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쩌다 연애 중
W. 띵동댕
“혹시, 영상 통화 내용을 들키고 싶지 않은 건가, 친구들한테?”
쓸데없이 눈치만 빠른 전정국이다. 내 약점을 알아내서 들떠 까맣게 빛나는 전정국의 눈동자에 다시 얼굴이 질린 내 얼굴이 비춰보였다. 자신만만한 전정국과 약점을 들킨 내 표정이 대조되었다.
“… 응.”
전정국의 기똥찬 발언이 끝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아까와는 다르게 잔뜩 풀이 죽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장면을 제 3자의 눈으로 보게 된다면 수치스러워서 못 견딜 것 같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전정국에게 이런 모습을 보인다는 건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또 세게 나가 말도 안 되는 말을 해 전정국이 더 많은 걸 알아채는 것보단 순순히 굽히고 들어가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
잔뜩 풀 죽은 내 목소리를 들은 전정국은 한쪽 눈썹을 으쓱하며 약간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이런 반응을 보일 줄 몰랐던 걸까?
“그러니까, 말하지 말아 줘. 부탁할게.”
전정국에게 할 수 있을 만큼 최대한 친절하게, 또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전정국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게 조심하며. 16년 인생을 살며 이렇게나 남의 눈치를 본 건 처음이다. 힐끔 곁눈질로 전정국을 보자 내 말에 그다지 동의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넌 모르겠지만, 나한텐 그거 그 누구에게도 들키기 싫은 거야. 흔히 말하는 흑역사지. 그것도 완전 흑흑흑역사.”
간절한 내 마음이 통했던 걸까. 차갑기만 했던 전정국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내 말이 전정국의 마음을 움직인 걸까, 혹은 나를 더 조종할 수 있는 미끼가 된 걸까. 전정국의 표정에 슬슬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렇게 비밀로 하고 싶은 거면, 비밀로 해 주고.”
선심 쓰듯 말하며 어디서 찾았는지 빼빼로까지 오독오독 씹으며 말하는 전정국은 누가 봐도 얄미운 모습이었지만, 지금의 나에겐 전정국이 이렇게나 고마울 수가 없다.
엄밀히 말해 전정국을 본 지는 얼마 안 되었지만, 그동안 하도 전정국 눈치를 보고 다니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적 친밀감 비슷한 게 생겼나 보다. 할 수만 있으면 전정국을 힘껏 껴안고 고맙다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정신을 차렸다. 상대는 전정국, 내 치명적인 비밀을 알고 있는 마치 시한폭탄과도 같은 존재다.
“… 그런데 이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정당한 대가가 있어야 내가 비밀을 지켜주던지 말던지 하지.”
방금 내 기분에 완전히 얼음을 탄 찬물을 부어버린 전정국의 말이었다. 여기서 내가 발끈한다면, 제 발로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처지가 될 테니 꾹 참았다.
“뭘 원하는데? 그럼?”
내 말에 전정국은 잠깐 고민하더니, 미리 생각해둔 것이 있었는지 입을 열었다. 미리 생각해뒀다는 건 내가 본인의 요청을 따르겠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거다. 내가 남이 생각한 그대로 행동하게 되다니, 정말 놀라웠다.
“… 내-”
“네가 하라는 대로 다 하라고? 그래, 좋아.”
무슨 생각으로 전정국의 말을 끊었는지 모르겠다. 조금 더 조심스럽게 고민하더니 서서히 뗀 전정국의 입이 완성된 한 문장을 내뱉기를 기다려왔다는 듯 허둥지둥 말을 끊어버린 것이다.

“무르기 없기다.”
전정국이 원래 나에게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는진 모른다. 그다지 알고 싶지도 않지만, 이렇게 순순히 받아들이고 내가 본인의 말을 끊은 거에 대해서 태클을 걸지 않는 걸 보니 대충 비슷한 걸 원했던 것 같다. 도저히 본인 입으로 말하기 부끄러웠던 걸 내가 덥썩 대신 말해줘서 신난 것 같기도 하고. 어쩐지 찝찝한 기분은 뒤로하고 전정국과 짧은 눈맞춤으로 무언의 계약을 한 후 내 방을 나왔다.
그때까지는 상상도 못했다. 다음 날 학교에서 어떤 일이 생길지. 전정국과의 악연이 끝날 거라고 기대한 내 머리가 한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