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이상해… 너… 진짜 설아 맞아?”
그 순간, 조용히 누군가의 손이 그의 손을 잡았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온기.
"....!!!!"
그 손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바닥 위에
무언가를 쓰듯 움직였다.
촉감.
손가락 하나하나가 움직이며
마치 글씨를 새기듯…
손바닥 위에 남겨진 글자 하나—
느껴지는 그 글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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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쳐.”
그 한 단어가 연준의 몸을 꿰뚫었다.
눈동자가 떨렸고, 입술이 떨렸다.
그는 고개를 들어 앞에 있는 설아의 형상을 바라봤다.
이제는 알 수 있었다.
“…너… 설이가..... 아니...구나.......”
그 순간, 그 형상이 변했다.
미소를 짓던 입꼬리가 비틀리듯 올라가고, 눈동자는 허무한 구멍처럼 어두워졌다.
“크킄… 들켰네?
하지만—너무 늦었어.
내 계획을 망치지 마아아아아아!!!!!!!
이…… 이… 이이이이이이이이이익!!!!!!!”
악귀의 괴성이 지옥의 바람처럼 몰아쳤다.
순식간에 연준의 몸은 어둠 속으로 끌려들었고,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이 결박당한 채,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았다.
“안 돼…! 안 돼!!! 윽… 으아아아악…!!”
숨이 막혔다.
공기가 사라졌다.
폐는 타들어 갔고, 온몸이 짓눌렸다.
연준은 발버둥쳤지만, 소용없었다.
온 세상이 어둠으로 물들어 가는 그 찰나—
"푸학!"
물 위로 숨이 튀어나왔다.
연준의 몸이 거칠게 수면을 뚫고 솟구쳤다.
“ㅇ... 연준아!!!!! 연준아!!!! 정신 차려봐!!! 제발…!!!”
비명 섞인 울음소리.
그 속엔 간절함과 절망이 엉켜 있었다.
수빈이었다.
흠뻑 젖은 채 물에 반쯤 들어간 그는 연준을 끌어안고 흔들고 있었다.
“눈 좀 떠봐… 진짜… 진짜 흐윽.....…”
연준은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걸 느꼈다.
시야가 흐려졌다.
눈앞엔 수빈의 얼굴, 그리고—
그의 왼손.
그 손에 꼭 쥐어진 건, 붉은 작약 한 송이.
연준의 시야는 그 꽃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모든 것이, 조용히 사라졌다.
삐—
설아는 검은 연기에 뒤덮인 공간에 있었다.
몸은 찢어진 듯 무너졌고,
목을 조여오는 악귀의 손아귀는 뼛속까지 아팠다.
“으윽… 흐윽… 그만…!”
“이젠 늦었어.
너, 나랑 계약했잖아, 기억 안 나?”
설아는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나는… 단지… 그이를... 한 번만 보고 싶었을 뿐이야악아크윽....…”
“그래서 나한테 부탁했잖아.
네 얼굴을 빌려서, 이승에 나갈 기회를 달라고.
그 조건으로—내가 원하는 걸 허락한다고.
그게 니 약속이었잖아!!!!!!!!!!!”
“…그건… 네가 연준한테 해코지할 줄 몰랐으니까…”
“킄킄… 바보 같은년… 넌 내가 누군지 몰랐어?
난 너 같은 거 도와줄 생각도 없는 악귀라고.”
“…그래서 내가…”
설아는 떨리는 눈으로 악귀를 바라봤다.
“…이미… 차사에게 작약을 빌렸어.
그걸로… 너랑 난.… 끝이 될거다... 으윽.....”
“뭐… 뭐라고?”
“내가… 그이 보고 싶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널 붙잡았지만...
그 욕망이 .... 너 같은 걸 부른 거라면,
차라리 내가 사라지는 게 나아…”
“…… 지금 뭐라고 했어…?”
“악귀와의 계약은 이미 금지된 것......
너도 알잖아.
작약을 차사한테 직접 빌렸다는 건…
넌 이제 같이 사라질 운명이라는 거야"
“안 돼… 안 돼!!! 안 된다고!!!!”
악귀가 괴성을 지르며 설아를 조였다.
그러나 늦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종소리.
죽은 자를 이끄는 차사의 기척.
설아는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다.
“연준아… 잘 살아.
그게 내 소원이야…”
삐이이이이이이—!!!
“헉!!!”
연준이 눈을 떴다.
뜨자마자 보인 건 수빈의 눈물 범벅 얼굴이었다.
“ㅁ..뭐야.. ㅇ... 연준아, ㅈ....정신 들었어? 최연준!! ㄱ...괜찮아?!”
연준은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돌렸다.
“…여긴… 병원…?”
“야아...!!!!! 내가 진짜 너 때문에... 못 살아.... 흐으허어어엉....
ㅁ... 물에서 너가 안 나와서… 나, 진짜 무서웠다고…”
“.. 설아는… 설아는…!”
“조용히 좀 해! 아직도...... 아직도 설아 타령이야???????
너 어떻게 하려고 그래에!!!!!! 제발.......”
수빈은 눈물을 닦으며 연준의 손을 꼭 쥐었다.
“작약이… 물 위에 떠 있었어.
이상하게, 그걸 보고 가야겠다 싶었고…
그 꽃 쪽으로 가니까… 네 몸이 갑자기 떠올랐어.”
“…작약이…?”
연준은 몸을 일으키려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쥐었다.
그 손안에 뭔가가 있었다.
“…이건…?”
조심스럽게 펼쳐본 종이 한 장.
낡고 젖은 쪽지 위에, 또박또박 적힌 글씨.
“연준아, 사랑해.
나 묻어두고, 꼭 잘 살아.
그게 내 소원이야.”
연준은 복도 한가운데 주저앉았다.
입을 틀어막은 채, 울음이 터졌다.
“흐그윽… 흐아악…
설아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 울음은 이미 늦은 인사였고,
마지막 작별이었다.
수빈은 그 옆에 조용히 앉아 등을 토닥였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설아와 연준의 마지막을 ... 잘 묻을 수 있도록 지켜보는 게
주변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으니까.
1년 후,
평범한 퇴근길.
정장을 입은 연준은 조용히 집 문을 열었다.
현관에 들어서자, 조용한 공기와 따뜻한 향기가 반겨준다.
그리고—식탁 한 켠으로 시선을 옮긴다.
유리 화병 속,
붉은 작약 한 송이.
연준은 조심스럽게 그 꽃을 쓰다듬었다.
“…잘 지내고 있지…?”
연준은 고개를 들어, 베란다 바깥을 바라본다.
해가 지고, 하늘은 주황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 너머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아주 잠깐, 스치듯 지나갔다.
그치만 연준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조용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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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가 날 애타게 찾아도 [END]
